바깥일기(칼럼)

이카루스의 추락 (정의평화 2009 10)

바깥 주인장 2010. 1. 31. 20:19

 

 

 

이카루스의 추락

장동훈 신부

 

세상은 내가 없어도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며 아무 일 없이 흘러간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온 우주가 온통 내 중심에서 돌다가 어느 날 오히려 내가 우주 속 아주 작은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어쩌면 아이의 몽상뿐만이 아니라 적응과 자족이라는 명분으로 스스로 놓아버리게 되는 '이상'인지도 모른다.

 

몇 년 전 브뤼셀의 왕립미술관에서 피터 브뤼겔(Peeter Brueghels 1525-1569)의 '이카루스의 추락'을 처음 본 순간 이제까지 말로 옮기기 어려웠던 성장기의 감성을 작가가 훔쳐보기라도 한 듯 하여 놀라 탄복하며 한참을 그림 앞에서 떠나지 못했다. 동시대의 작가들에게 단골 메뉴였던 이카루스의 이야기를 격정과 드라마틱한 붓질이 아니라 익살과 풍자로 그려낸 브뤼겔의 시선이 남다르다. 제목은 이카루스의 추락인데 어디를 봐도 태양을 향해 날던 이카루스의 날개는 보이지 않는다. 목가적 풍경위에 농부가 밭을 같고 목동이 양을 치며 바다의 범선은 바람 가득한 돛을 펼치며 바다로 미끄러지는 화면 어디에도 이카루스의 날개는 없다. 짐짓 차분하고 평화롭기까지 하다. 누구라도 화면 오른쪽 구석에서 자맥질을 하는 듯 하늘로 향한 발을 간신히 발견한 순간 피식 웃음과 함께 브뤼겔의 남다른 통찰력에 놀라리라. 세상은 어쩌면 브뤼겔의 이야기처럼 내가 어느 날 없어져도, 그리고 이역만리 이국의 땅에서 일어난 참변 앞에서도 끊임없이 돌아가는 '무심의 운동'만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즘 세태를 보면 500년이라는 간극에도 불구하고 브뤼겔이 발견했던 그 "무심의 운동"이 여전히 대한민국의 오늘에도 유효한 듯 하여 슬퍼진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연일 "삽질"을 외치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과 가히 전 방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기득권 세력의 공세에 우리가 잃어가는 것은 아이의 몽상뿐만이 아닌 것 같다. 현실의 비정함에 압도된 이상, 값싸게 팔아넘겨진 가치, 약자만을 양산하는 품위 없는 정책들 모두, 브뤼겔의 그림 속 이카루스의 추락에도 무심히 제 할 일만을 하는 '이상'을 잃어버린 세상 같아 섬뜩하다.

4대강 정비사업, 노동법 개정 파문, 미디어법, 의료민영화, 용산 참사, 전직 대통령의 죽음,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일들이 여전히 '무심히'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우리를 정말로 두렵게 하는 것은 이 수많은 이카루스의 추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심하게 밭을 갈고 양을 치는 작은이들의 '침묵'이다. 용산 참사의 비극은 공권력 남용이나 사람이 죽어나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정부의 파렴치한 행태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들의 외면과 침묵인 것이다. 이제까지 꿈꾸고 만들어가던 우리의 '날개'가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은 채 곤두박질치는 저 그림 속 초라한 두 다리처럼 세상의 침묵과 무심 속에 이대로 바다 속 심연으로 영영 수장될 것 같아 두렵다.

 

아이가 되고 싶다. 무심한 세상의 침묵 속에 잊혀져가던 비루한 이들의 삶을 품으로 안았던 복음의 예수처럼 살기위해 우리는 아이가 되어야한다. 차분하고 짐짓 평화롭기까지 한 세상의 가짜 고요에 우리는 아이처럼 목 놓아 울어야하겠다. 라자로의 죽음 앞에 신이라는 품위를 벗어던지고 친구의 죽음으로 진심으로 엉엉대던 그 못난이 인간 예수의 눈물을 배워야 하겠다. 아이처럼 진심으로 울어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