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저 말들을 높고 반짝이는 자리에 올려두었을까(세상 속의 교회 2026년 3-6월 통합호)

누가 저 말들을 높고 반짝이는 자리에 올려두었을까 2015년, 귀국 후 처음 다시 찾은 로마. 공항과 도심을 잇는 도로를 따라 촘촘히 늘어선 대형 광고판들을 무심히 바라보던 중이었습니다. ‘자비’(Misericordia)라는 큼지막한 글씨가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갑니다. 제대로 본 것일까? ‘자비’와 같은 말이 다국적 대기업들이나 차지할 저 비싼 자리에 있을 리 없었습니다. 저만치 광고판이 다시 보입니다. 한 해 전 선포된 ‘자비의 특별 희년’을 기념해 로마를 방문하는 순례객들을 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매가리 없고, 말라비틀어진 저 말을 그가 아니라면 누가 저 높이, 저리도 반짝이는 곳에 올려둘 수 있단 말인가. 놀랍고도 낯선 체험이었습니다.‘광고판’과 함께 프란치스코 교황과 관련해 잊히지 않는 또 다..

Ecclesia in mundo 2026.08.17 0

당나귀는 그냥 오지 않는다(세상 속의 교회 2026년 1-2월호)

당나귀는 그냥 오지 않는다이탈리아 북부 도시 베르가모. 여러 주요 도시를 포기하고 이 낯선 곳에 여장을 푼 것은 순전히 교황 요한 23세의 고향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연구소 후원자들과 떠나는 ‘교회사 순례’ 일정에 낯선 이름이 끼어있자 모두가 의아해했습니다. 순례의 주제 가운데 하나가 ‘공의회’인데 이곳을 빼놓을 수 있겠냐고 반문했지만, 실은 유학 시절부터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욕심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서른 명 남짓한 이들을 이끌고 길을 나서기엔 도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내심 불안하기도 했습니다.불안한 마음은 그러나 그날 아침 옅은 안개처럼 금세 사라졌습니다. 산 위 요새처럼 베네치아 공국 시절 축조된 높다란 성벽으로 둘러싸인 ‘상부 도시’의 골목을 누비다 우연히 다다른 베르가모 신학교...

Ecclesia in mundo 2026.03.04 1

다만 두 부류의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세상 속의 교회 2025년 11-12월호)

다만 두 부류의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을 경문에 박아 주일마다 되뇔 만큼 교회는 ‘전통’을 중시하는 조직입니다. 하지만 늘 한결같다곤 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사도좌의 지도력은 교황 개인의 카리스마와 세상의 흐름에 따라 각기 다르게 발현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말하는 세상에 대한 감각이 유행에 민감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때로 세상에 압도되긴 했어도, 대부분 그것을 거스르는, 시대정신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지난봄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도 그랬습니다. 신자유주의에 맞서 그보다 끈덕지고 용맹했던 이도 없습니다. 선출 직후,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들의 기착지인 이탈리아 람페두사를 찾아 그가 바다 위에 던진 꽃다발은 거친 파도가 집어삼킨 무명의 죽음들을 위한 애도 이전에 12년간 자신이..

Ecclesia in mundo 2025.12.22 1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세상 속의 교회 2025년 9-10월호)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모두에게 열려있는 박물관이지만 가끔은 달갑지 않은 손님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그 수가 부쩍 늘었습니다. ‘순례 도장’을 찍으러 찾아오는 이들입니다. 대부분 순교 영성을 고취하고 건강한 순례 문화를 정착한다는 취지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순교자 현양과 성지순례사목 위원회’가 지정한 순례지들을 완주하려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간혹 그 취지가 무색하게 다짜고짜 도장만을 찾습니다. 인천교구역사박물관은 지정 순례지가 아니라고 설명해도 불안한지 서명이라도 해달라고 부탁해 오곤 합니다. 이미 박물관 관람은 중요치 않습니다. 도장을 서둘러 ‘수집’하고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올라 다음 순례지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순례 프로그램은 여러 면에서 의미가 깊습니다. 전국 각지의 숨겨진 순례지..

Ecclesia in mundo 2025.12.18 1

군말 없이(세상 속의 교회 2025년 7-8월호)

군말 없이 올해 들어 하나 더 얹게 된 소임 덕에 교구 내 본당을 차례차례 방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관심을 끄는 것은 성사 대장 등 검토해야 할 문서보다 오래된 제구 등 본당 곳곳에 숨어있는 유물입니다. 가끔 대어도 낚습니다. 연안성당을 찾은 날도 그랬습니다. 오래된 장궤틀과 성모상 등 창고에 방치되던 건립 초기 제구들이 주임신부의 눈썰미 덕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진짜 대어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었습니다. 신자들은 볼 수 없고 주례 사제만 볼 수 있는 제대 뒷면의 그림입니다. 대야에 물이 담겨있고 반대편에는 수건이 있습니다. 그 사이 거대한 십자가로 뒤덮인 푸른 지구가 있습니다. 목각 부조로 스승의 마지막 만찬이 장식된 앞면으로 미루어 그 뜻은 분명합니다..

Ecclesia in mundo 2025.09.0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