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하느님
장동훈 (빈첸시오) 신부
90년대, 명료하게 보이던 극복의 대상들이 사라지는 듯 보이던 시절. 그리고 2000년이라는 새로운 천년기.
두리번거릴 필요 없이 걸어가던 길이 선명했던 팔십년, 그 거리의 잔상너머 여전히 우리는 새로운 극복의 대상들이 가진 낯선 모양새에 적잖게 당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낯선 그들의 모습에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시작할지 주저거립니다. 그 낯선 것들은 간혹 자연친화를 가장한 개발논리로, 경제를 빙자한 재화의 편중으로, 가끔은 빵이 아닌 영혼과 가치, 인간의 존엄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름도 모양도 다양한 그들의 낯선 모습에 우리는 당황스럽습니다.
몇 년 전 일어났던 보스니아 내전을 지켜보던 고등학교 은사님이 보내주신 편지글이 생각납니다. "저 분쟁의 땅에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없어서 하느님이 달려가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발만 구르고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일일까" 편지를 읽으며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내 기도가 없어 그 분쟁의 땅에 갈 수 없는 하느님이라면 얼마나 무력한 하느님인가. 동시에, 닿을지 몰라 불안하던 내 힘없는 기도가 하느님을 움직이는 힘을 지녔다면 우리의 기도는 얼마나 고귀하고 위대한가. 언젠가 읽었던 "하느님은 손과 발이 없습니다"라는 독일 신학자 본회퍼의 충격적 이야기가 비로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배로 명료하게 이해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나치수용소, 그 잔혹함과 무자비함의 포화 속에서 생을 마감하던 젊은 신학자 본회퍼가 희망하고 신앙하던 그 무력한 하느님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끝없는 믿음인 동시에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였습니다.
손과 발이 없는 "무력한 하느님", 인간의 기도가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용의 하느님. 하지만 그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것은 우리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 바보하느님은 더 이상 무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간절하게 희망하는 일들 한 가운데에 그리고 우리가 가려는 모든 길 위에 그 바보 하느님이 있습니다.
이제 새로운 기도를 드리려합니다. 오랫동안 그 무력한 하느님의 손과 발이 되어 부지런히 세상의 빛을 밝히던 부평 노동자 센터가 새롭게 기도를 드리려합니다. 다른 모양으로, 다른 간절한 기도 한 자락으로 "낯선 모양"으로 다가오는 세상의 "낯선 고통"을 함께하려 합니다. 하느님의 새로운 손과 발이 되려합니다.
이 인사말을 준비하며 저는 30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을 달려온 부평 노동자 센터의 선임자들의 노고를 가늠해봅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의 낯선 어둠을 다시 하느님의 또 다른 손과 발로 안아보려는 "우리"에게 축복해봅니다. 더불어 새로운 하느님의 손과 발이 빚어낼 멋진 희망도 상상해봅니다. 그리고 거기에 저의 손과 발도 함께 있기를 기도해봅니다.
세상의 상처를 싸매주고 무너진 무릎을 다시 일으켜 주는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바보 하느님의 손과 발, 바로 지금 이 땅에 서있는 "우리"입니다! 부평노동자 인성센터의 새로운 길에 바보 하느님이 동행하시길 두 손 모아 비나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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