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호퍼, Automat
오래된 미래
장동훈 신부
한 여인이 차를 마시고 있다. 화면 한편에 물러난 그녀의 등 뒤로는 어두운 밤이 있다. 그 어두운 창 너머 칠흑의 허공에는 사람이 달아놓은 실내 불빛의 잔영들만이 연속해서 반복된다. 거리의 차들도, 사람도, 불빛도 없이 다만 어두움이 가득한 거리를 뒤로하고 여인이 차를 마신다. 하얀색 테이블이 그녀의 핏기 없는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한다. 모자도 외투도 그리고 찻잔을 받쳐 든 장갑을 낀 왼손도 그녀가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임을, 단지 수많은 이들이 스쳐가는 익명의 공간에 잠시 머물 뿐임을 암시한다. 화면은 고독하고 음울하다. 그리고 불길하다.
풍요를 누리던 미국의 또 다른 단면을 잘 그려낸 에드워드 호퍼 (1882-1967)의 '무인가게'의 한 장면이다. Automat 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그의 그림에는 운집한 군중도 얼굴을 마주한 대화도 두 눈을 마주치는 공감도 없다. 인공 환경에 둘러싸인 풍요의 시대의 고독한 개인을 그린 그의 그림 속 인간의 군상은 늘 홀로, 혹은 함께 있지만 철저히 고립된 개인이다.
근대화를 한국만큼 압축적으로 그리고 드라마틱하게 겪어낸 나라는 찾기 힘들 것이다. 열강 속에 존립을 위협받고 강제로 문을 열고 근대라는 격랑을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으로 이겨내야 했던 것이 상처가득한 우리의 근대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바라보면 한때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던 아메리칸 드림이 가져다준 풍요 속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고독하고 허망한지를 실감한다. 우리에게도 아메리카는 꿈속의 나라였고 흉내내야할 표본 같은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그렇게도 동경하고 닮고자 악악대며 살아가는 우리들 모습이 슬프게도 그림 속 고립되고 허망한 군상들이었다는 사실이 씁쓸할 따름이다.
우리들의 미래가 새로운 미래가 아닌 이미 그림 속 군상들이 겪어낸 오래된 미래라는 사실이 요즘 들어 더욱 분명해 보인다.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의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저 70년대 새마을 운동의 구호 같은 인간을 위해서라는 명분 뒤에 실상 인간은 없고, 풍요라는 선전벽보 뒤에서 빈곤과 폭력을 생산했던 개발망령이 다시 우리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아니 그 망령은 근대를 너무나 힘겹게 겪어낸 우리 주위에서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 망령에게 미래를 담보했고 우리의 존엄과 소중한 가치들을 값싸게 팔아넘겼는지도 모른다.
용산역의 사창가를 지나 거리에 천막을 치고 울부짖고 있는 이들을 찾아가보자. 주위를 둘러싼 그 육중하고 거대한 아파트와 고층 건물들은 마치 내일이라도 그 비루하고 남루한 집들을 쓸어버릴 태세로 노려보고 있다. 그 속에 사람들이 조물 거린다. 그 귀찮고 하찮아 보이는 인간들은 어쩌면 지금 우리를 대신해 오래된 미래와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풍요라는 이름으로 모든 게 용서되는 폭력의 망령에서, 공권력이라는 일방적 소통에서, 우리들의 존엄, 우리들의 가치를 그리고 희망을 다시금 되찾으려 그렇게 남루하지만 존엄하게 작지만 위대하게 기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된 미래의 그림을 걷어치우고 다시 그림을 그려보자.
한 여인이 찻집에 앉아있다. 그녀가 고개 숙여 응시하는 것은 찻잔 속 고독하고 무의미한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마주 앉은 상대의 두 눈이며 귓가를 스치는 소리는 자동판매기의 뜻 없는 기계음이 아닌 벗의 이야기다. 그들은 지금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희망한다. 또 다른 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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