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다 (강론)

아무것도 헤아리지 않으며(2019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일)

바깥 주인장 2019. 7. 13. 23:25

 

2019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일

루카 10, 25-37

 

복음 속 율법교사의 질문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한 ‘불순한’ 것이지만 우리에게 반드시 스스로 던져야할 질문임에는 분명합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지만 정작 이웃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이 ‘이웃’은 이름과 얼굴이 없는 관념이거나 혈연과 같은 좁은 울타리 안의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구체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일화를 통해 물어야할 다른 한 가지는 그의 행동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입니다. 복음은 늘 단순히 가진 것을 나누거나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을 누군가에게 양도 처분하는 것과는 다른 사랑을 말합니다. 또한 그 사랑이 어떤 특별한 여유와 능력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능력을 발견하는 일이란 사실도 가르칩니다.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너희에게 힘든 것도,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늘에 있지도 않다. 바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다.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그리할 수 있다.” 이 신명기 30장의 말씀처럼 사라마리인의 행동이 시작된 자리는 사실 밑도 끝도 없는 “가엾은 마음”이란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가엾은 마음에서 출발한 이 사랑은 그로 하여금 “길 건너편”의 여정을 기꺼이 중단하게 합니다. 엄청난 위력입니다. 오늘날 나약하다고 비난받아도 그만인 이 희미한 ‘측은지심’은 사실 인간에게 하느님이 품은 첫 마음이자 구원의 궁극적 힘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묵상할 것은 사마리아인이 서게 된 새로운 삶의 입구입니다. 복음은 그를 “여행자”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나름의 목적지와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길을 멈추었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즉각적인 응답’입니다. 자신의 경로를 고수하고는 절대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사랑을 살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20세기 초 급속한 산업화는 심각한 빈부격차를 불러왔고 진창 같은 사회의 맨 밑바닥은 가난한 노동자들로 채워졌습니다. 이 밑바닥의 사람들과 함께 살고자 했던 사제들이 있었습니다. 똑 같이 공장에서 일하고 그들과 다르지 않은 생활방식으로 살아갔던 이들입니다. 질베르 세스브롱의 소설 “성인 지옥에 가다”는 바로 이 ‘전설’ 같은 ‘노동사제’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941년 도미니코회 소속 프랑스 신부 자크 뢰브는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그들의 처지를 조사하라는 장상 신부의 명으로 그들에게 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구’가 아니라 그들과 같은 처지로 살아야함을 깨닫고선 아예 스스로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이 모범을 따라 많은 사제들이 공장으로 들어갔고 그렇게 “미숑 드 프랑스”라는 이름의 노동사제 그룹이 생겨납니다. 1967년 여느 노동자처럼 작업 도중 사망한 벨기에 사제 에지드 반 브르크호벤도 이들의 후예입니다. “우정일기”란 제목으로 출판된 그의 일기 일부를 잠깐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사제란 사실이 들통 나고 그것으로 공장에서 쫓겨났을 때를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 중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였지요. 우리는 그들처럼 일하러가고, 아무것도 헤아리지 않으며, 그들처럼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아무것도 없어야합니다. 이 점을 알게 된 것은 내가 해고되었을 때, 가장 가난한 이들 중 하나인 A가 내게 ‘에지드, 자네가 곤란하게 될 때는 언제고 나한테 의지할 수 있다네. 자네가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우리 집에 와서 묵게나’라고 말해준 때였습니다.” 그 역시 이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A는 에지드가 도움을 주고자한 강도만난 사람이지만 이젠 그가 에지드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강도만난 이웃인 것입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무한히 확장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에지드가 말하는 “아무것도 헤아리지 않으며”를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세스브롱의 소설 속 피에르 신부는 공장에서의 소임이 끝나자 본당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탄광 갱도 입구로 향합니다. 피에르가 갱도 입구에 멈춰선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나름의 계획과 목적, 준비가 있던 사마리아 여행자를 붙들어 맨 사랑의 모습이겠습니다. 기꺼이 아무것도 헤아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 특출한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은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 우리가 충분히 사랑할 수 있다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여관 주인에게 건넨 ‘두 달란트’는 이런 의미에서 ‘가엾은 마음’, 평범하지만 누구도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우리 능력의 실재인 셈입니다.

 

모두 노동사제들과 같은 특별한 사랑을 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깊이 묵상할 것은 무언가 갖추고 계획하고 준비되어야만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능력, 우리가 이미 품고 있는 사랑의 힘은 이미 대단한 것입니다. 준비되고 계획된 사랑이 없듯, 사랑은 불시에 폭풍처럼 다가옵니다. 사람에게, 가난한 사람에게, 강도만난 나의 이웃에게 향하는 일은 그래서 우리에게 ‘지금’, ‘언제든’, ‘쉼 없이’ 요청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