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6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16, 12-15
올해로 본당에서 맞는 세 번째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3년을 주기로 말씀이 순환하지만 오늘과 같은 대축일은 매해 돌아옵니다. 1)첫해에는 본당 교우들 대부분의 거주형태인 아파트 예를 들며 침해받지 않고 이웃에게 무관심한 삶에 익숙한 우리에 반해 자신을 벗어나고 경계를 넘어 서로 사귀길 멈추지 않는 아버지와 아들, 성령의 사랑에 대하여 말씀 드렸습니다. 자신을 벗어나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2)작년에는 삼위일체는 다름 아닌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라고 설명 드렸습니다. 본디 유대인이었던 예수의 제자들이 모세와 조상을 통해 알게 된 한분이신 하느님을 예수 안에서 발견했고 예수의 모습을 다시 그를 쫓는 이들의 삶 안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유일한 하느님이 인간에게 오기 위해 스스로 자족하고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로서의 전통적 신의 개념마저 뛰어넘은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 삼위일체라고 설명했었습니다. 곧 삼위일체는 지금까지 인류가 믿어왔던 신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 예수 안에서 깨닫게 된 새로운 하느님에 대한 고백인 것입니다.
올해는 이렇게 묵상해봤습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입니다. 서기 70년경에 작성된 작품입니다. 오늘 읽은 부분은 예수의 고별사 중 하나이지만 작성 시기를 고려하면 이미 과거의 일에 해당합니다. 예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진리의 영이 오고 이를 통해 예수의 뜻과 아버지의 뜻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이 작성되던 이 시기 공동체가 맞닥트린 문제는 곧 온다는 예수의 약속이 언제 실현될지 갈수록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곧 온다했는데 그 시간은 뒤로만 밀려나갔고 약속을 전해들은 첫 제자들은 나이가 들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던 시기였습니다. 직접 목격자들이 사라지고 이제 다음 세대로 교체되던 시기. 직제자들의 뜨겁고 생생한 증언이 희미해지던 시절, 공동체를 지키는데 결정적이었던 그들의 증언마저 더는 들을 수 없고 예수를 ‘전해들은’ 이들만 남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식별하고 결정해야합니다.
아마도 이 공동체는 첫 세대들이 스승 예수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했다면 이제 무엇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고백할지 질문했을 것입니다. 부활한 스승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그분인 줄 알아보는 제자들, 토마의 불신앙과 곧 이은 신앙고백, 엠마오로 가던 길 위의 제자들 이야기는 직접 목격자들이 사라진 당시 공동체의 처지를 상징하는 동시에 공동체의 이제부터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하겠습니다. 스승은 떠났고 홀로 남겨진 제자들. 그러나 스승이 아닌 평범한 길벗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제는 사람들 안에서 떠나간 스승을 발견하는 것이고 또 발견해야하는 것입니다. 유대 동포들로부터도 로마제국으로부터도 불온한 집단으로 낙인찍혔고 심지어 자신들의 뿌리였던 회당에서마저 쫓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공동체, 그러나 이 공동체는 박해와 장애에도 쉼 없이 뻗어 나가는 복음과 신앙의 고백들을 목격하는 힘있는 공동체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 안에 여전히 살아계시는 스승!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창조주 하느님을 실감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삼위일체 신앙은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이야기인 것이고, 신에 대한 정의라기보다는 세상을 살아가는 믿는 이들의 이야기, 어떤 어려운 개념이 아니라 생생한 인간들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몇 주 전 총회 마무리 중 저의 눈물을 기억하실 테죠. ‘악어의 눈물’이란 변명으로 창피함을 덜고 싶었습니다만 사실 속으론 더 울었습니다. 그날 제가 본 것은 우리를 서로 단단히 묶어둔 하느님의 의지, 놀라운 성령이었습니다. 저의 느낌만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르면서도 한 곳을 바라보는. 그것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잰걸음으로 달음질해 나아가고픈 생동하는 마음들 말입니다. 그날이 곧 성령강림이요 삼위일체 하느님의 체험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평범한 길벗에서, 선한 이들의 희생에서, 못난이들 서로의 보듬음에서, 정의를 위한 용기들에서, 복음적 가난에서, 성실한 섬김에서 하느님을 봅니다. 또한 우리는 세상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증언하는 이들입니다. 세상을 돌보고, 고통을 마주하며, 이웃을 살리고, 불의에 의연히 일어나고, 약자를 제 몸처럼 입히고 배불리며 우리는 우리를 통해 포기하지 않는 하느님, 끈질긴 하느님, 언제든 머무는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사람에게 하느님을 보여주는 ‘교회’입니다. 세상을 지어낸 하느님, 죽기까지 사랑한 예수, ‘우리를 통해 우리를 구하시는’ 성령,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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