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일
루카 10, 38-42
오늘 복음을 읽다보니 ‘여성주의’란 말이 아직은 낯설던 아주 오래전 신문광고가 떠오릅니다. 여자가 신문을 읽고 남자는 등에 아이를 업은 채 청소하고 있습니다. 광고 하단에는 큼지막하게 “자연스러워 보이십니까?”라고 쓰여 있습니다. 아이를 돌보고 가사를 꾸리는 것은 여성의 일이고 밖에서 돈을 벌고 집에서는 신문이나 읽는 것이 남성의 역할이라는 것이 광고를 낸 사람의 주장임은 확실해보입니다. 이런 고정된 역할은 광고를 낸 사람에겐 어디까지나 순리에 맞는 ‘자연스러운’일이겠습니다. 이런 차별적이고 편협한 인식이 신문지상에 버젓이 올라올 수 있었던 과거를 생각하면 오늘의 사정은 그야말로 격세지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자연스러움’ 또한 실상 당대의 문화와 인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전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일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상식’과 ‘보통’ 역시 어쩌면 언제나 통용되는 진리에 가까운 것이라기보다는 한 사회의 계층 간 이해관계와 권력구조의 부산물일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다른 어떤 복음보다 역사를 거듭하며 그 시대의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왔습니다. 피어나고 스러지는 계절 같은 덧없는 현실의 것보다 부동의 진리를 추구하던 중세에서는 먹고 사는 문제로 부산한 평신도보다 보이지 않는 진리를 추구하는 수도자와 같은 관상의 삶이 더 고귀하다 말하기위해 사용되었고, 유대교 등 기성종교를 뛰어넘어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강조해야하는 교부시대에는 마르타를 유대교로, 좋은 것을 택한 마리아를 교회로 해석하길 좋아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마르타를 현실의 삶으로, 마리아를 피안의 세계 너머에 있는 하느님 나라로 비유했습니다. 현대의 여성주의운동에서는 아마도 마르타를 남성 권력이 만들어놓은 구습에 얽매인 고리타분한 인간으로, 마리아를 자신의 존엄과 정체성을 찾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습니다. 실제로 예수 시대에 율법의 가르침을 듣고 공부하는 것은 남성만이 누리는 권리였습니다. 마리아의 모습은 당대의 관점에서는 그 자체로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발칙한 저항이겠습니다.
이러한 해석들은 모두 날카로운 이원론에 익숙한 절름발이 해석일 수 있겠습니다. 어쨌거나 하나는 좋고 다른 하나는 나쁜, 하나는 고귀하고 다른 하나는 덜 고귀한 우열을 매겨야하는 해석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예수 역시 어떤 한쪽의 손을 들어줘야하는 처지일 뿐입니다. 또한 교회를 남성주의의 온상으로 지목한 근래의 일부 여성운동 진영의 주장에 달리 변명할 것이 없는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물론 예수 역시 특정 시대의 문화 안에 살던 역사적 존재이기에 당대의 이른바 ‘상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지만, 세기를 뛰어넘어 거듭 새롭게 읽혀져야 하는 것이 복음이라면 다른 시선에서 바라봐야겠습니다.
복음의 중심은 어쩌면 마르타와 마리아의 역할이나 이에 대한 예수의 개입이 아니라 일화를 통해 예수가 궁극적으로 전하고자하는 메시지가 담겨있는 후반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필요한 한 가지”, “빼앗기지 않을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겠습니다. 스승은 사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습니다. 무릇 누구에게나 역할이 존재한다는 상식을 스승은 단지 “선택한 몫”으로 여김으로써 마르타의 역할을 평가절하하지 않으면서도 그녀와 마리아 모두의 역할 또한 선택의 결과로 남겨둡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경로를 밟든 선택한 몫에 따라 정작 본질적인, “필요한 한 가지”, “빼앗기지 않을 것”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로서 활동과 관상, 행동과 기도, 현세와 내세, 평신도와 수도자와 같은 우열을 가리고자하는 이분법적 인식은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모두 각자의 목소리로 하느님께 응답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하느님을 배우며, 각자의 고유함으로 하느님을 증거 할 뿐입니다. 필요한 한 가지, 빼앗기지 말아야할 것은, 무엇이 옳고 누가 높으냐를 따지는 무용한 가치매김이 아니라, 저마다 고유한 모습으로 하느님을 찾는 일이겠습니다.
꾸르실료 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노래, ‘데 꼴로레스(De colores)’는 직역하자면 “색깔들”입니다. 노래의 기원이 꾸르실료 운동 초기, 아름다운 들판을 걷다가 누군가 부르기 시작해 흥겹게 따라 부른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니, 들의 형형색색 꽃들과 나무들, 하늘과 땅의 빛깔처럼 이 단어는 “다채로움”으로 의역될 수 있겠습니다. 저마다의 빛깔로 아름다움이라는 선에 기여하는 들판의 꽃들처럼 하느님은 우리들을 획일적인 하나의 모습으로 기다리지 않으시고 각자의 모습과 고유한 응답으로 당신을 찾아오길 고대하십니다. 필요한 한 가지를 찾고 빼앗기지 않는 우리이길 희망합니다.
오늘은 농민주일이기도 합니다. 뿌리지 않고도 거두기를 바라고 일확천금을 위해 무엇도 주저하지 않는 오늘에 농민들은 실로 성실한 수고와 정직한 열매라는 하늘과 땅의 진리를 유일하게 알아듣고 몸으로 살아내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지키고 있는 것은 쌀이나 땅만이 아니라 어쩌면 이런 보이지 않는, 빼앗기지 말아야할 것들이겠습니다. 잠시라도 농민을 비롯한 각자의 모습으로 서로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이 거대하고 견고한 생명의 연대를 느끼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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