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다 (강론)

노예가 아니다(2019년 8월 4일 연중 제18주일)

바깥 주인장 2019. 8. 3. 22:06

2019년 8월 4일 연중 제18주일

루카 12, 13-21

 

아이들과 평화순례 잘 다녀왔습니다. 순례 내내 그럼에도 우리를 괴롭혔던 것은 예상치 못한 더위였습니다. 어딜 가나 에어컨은 시원찮았고 여정 막바지에는 아예 에어컨도 없는 숙소에서(비교적 낮은 기온의 러시아라 그런 것 같습니다) 잠을 청해야했습니다. 그럼에도 볼멘소리 없이 씩씩한 아이들이 고마워 예정에 없던 기념품 매장을 방문했습니다.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였습니다. 생각해보면 평소에 누리던 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란 사실과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소비행위에 얼마나 행복의 많은 부분을 내맡기고 있는지 깨닫는 고마운 여정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언뜻 듣기엔 성전의 환전상들에게 채찍을 휘두른 예수의 행위,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찾아온 부자청년의 좌절처럼 예수의 재화에 대한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평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환전 대를 들어 엎은 분노는 성전이라는 신성한 공간에 돈이라는 부정된 것이 끼어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밖 각국에서 찾아온 순례자들을 엄청난 환차익으로 등쳐먹는 환전상들의 탐욕을 꾸짖고, 거기까지 오느라 궁핍해진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분노는 가난한 이들을 보호하고자 함이었고, 신성한 공간을 더럽히는 부정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라는 본질을 잊은 채 욕망을 채우는데 몰두하는 성전의 이율배반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부자청년이 하늘에 들어 갈 수 없는 이유는 단지 부유해서가 아니라 재화에 하늘나라를 포기할 만큼 완전히 포섭된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재화나 그것의 축적 자체를 탓함이 아니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에 함축되듯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2독서의 말씀처럼 “위에 있는 것”을 먼저 생각하라는 의미요 1독서 코헬렛의 인생의 허무가 아니라 더 굳건하고 썩지 않는 삶을 추구하라는 뜻입니다.

 

“세속도시”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개신교 신학자 하비콕스는 날로 복잡하게 변해가는 세상의 흐름을 어느 순간부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더랍니다. 그러던 중 동료로부터 현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실로 이해하려면 경제면을 살피라는 조언을 들었답니다. 신학자로서 경제에 문외한이던 그가 시장경제를 공부하길 결심하게 된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본주의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도 결정적이었답니다. 교황은 즉위 초기부터 일관되게 약자들을 희생 제물로 삼는 오늘의 무자비한 자유 시장경제, 더 정확히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새로운 독재”로 규정해왔습니다. 콕스는 나아가 이 체제를 ‘신’으로 정의하고, “신이 된 시장”이란 작품으로 오늘의 문화 깊숙이 들어와 있는 신성화된, 아니 이미 신이, 종교가 되어버린 ‘시장’을 낱낱이 파헤칩니다. 신이 전능한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같이 앞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제인데 시장에서는 이것이 역순으로 이루어진다고 분석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환산’될 수 있다는 전능으로 발휘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전통사회에서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땅과 물과 같은,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공공재’는 물론이고 사람마저 모두 숫자, 경제적 이익으로 환원된다는 것입니다. 이 전능한 신이 원하는 제물은 당연히 사회의 가장 허약한 부분, 다양한 차원의 약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신의 모상은 고사하고 살과 뼈가 있고 곡절이 있는 인간은 그렇게 무참히 갈려 단지 숫자로 남을 뿐입니다. 얼마나 무자비한 일입니까. 더 무서운 것은 그리스도인, 교회조차 이 무자비함 위에 세워진 새로운 종교에 흠뻑 젖어, 아니 먹힌 지 오래라는 현실입니다.

 

더위와 싸우던 우리와 달리 그간 이곳에선 큰비가 내렸습니다. 그로인해 안타까운 죽음도 있었습니다. 빗물 펌프장에서 시설을 정비하다 벌어진 일인데 셋 중 둘은 비정규직이고 나머지 하나는 임박한 수문개방을 알리려 들어갔던 정규직 동료였습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불행과 재난은 가장 취약한 이들부터 삼켜버렸습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에 가장먼저 투입된 이들도, 작년 많은 이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 전동차 안전문 사고도, 그리고 화력발전소 화구 속 죽음도, 모두 비정규직들이었습니다. 비정규직이 무엇입니까. 최소투자 최대이윤이라는 신앙을 위해 고안된 고용형태입니다. 사람은 여기서 장부 수익란의 숫자일 따름입니다. 밤을 밝히는 불빛, 밥을 짓고 몸을 씻는 수돗물, 교통수단, 더위를 식힐 에어컨, 이 모두는 심각한 어떤 생각을 동반하지 않는 일상행위입니다만 그 이면 이러한 안타까운 목숨들을 떠올리면 결코 무고할 수만은 없단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소비행위에 우리 행복을 이런 식으로 저당 잡힐 수 없는 것이고, 일상행위 저편의 ‘생략된’ 이들, 숫자 안으로 우겨넣어진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승의 재화에 대한 가르침은 재화 자체에 대한 부정이나 검약함과 같은 도덕적 삶의 요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의 사용을 문제 삼는 것이고, 돈 따위에 붙들려있는 가엾은 삶에 대한 폭로이며 사람을 숫자 안에 갈아 넣어 만든 끔찍한 현실에 대한 고발인 것입니다. 우리는 스승으로부터 도덕이 아니라 인격을 배우는 것입니다. 단순히 재화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스승의 인격을 입은 사람으로서 그것을 다룰 줄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물질에 포섭된 노예가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새 인간”, “자유인”이어야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