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일기(칼럼)

이 땅의 동방박사들 (외국인노동자 소식지 2009 12)

바깥 주인장 2010. 1. 31. 20:47

 

이 땅의 동방박사들

장동훈 신부

성탄과 연말이다. 따듯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훈훈한 이야기는 대부분 말보다 그 이야기가 전해주는 회화적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 틈틈이 모아온 그림 도록을 뒤적였다. 인류 최고의 이야기책 성서가 없었다면 화가들은 무엇을 그렸을까 싶을 정도로 성서의 유명한 주제들은 리사이틀도 그런 리사이틀이 없을 정도로 수도 없이 반복해서 다양한 손에 재생되었다. 성탄에 어울리는 그림은 단연 동방박사의 아기예수 방문과 목동들의 경배일 것이다. 사람의 눈은 미혹해서 보이는 것으로 의식을 재단해 상상력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옳은 말인 듯하다. 성서의 기록처럼 동방박사들은 나라도 언어도 그리고 피부도 각기 다르지만 화가가 꾸며놓은 화면 속 그들은 전혀 다른 나라에서 온 이들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 복장도 배경도 그리고 피부색도 작가 자신이 바라보던 세상의 기준만으로 그려진 듯 일률적이어서 따분하다.

정말 그런가 싶어 도록을 뒤지고 또 뒤졌다. 그나마 발견한 그림은 단일 회화작품도 아니고 인쇄술의 발명 이전, 중세 필사본에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옆에 그려 넣은 삽화정도였다. 만화처럼 우스꽝스러운 큰머리와 도대체 이 사람들이 왜 왔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머리를 긁적이는 듯한 요셉의 묘한 표정. 우습다. 온종일 수도원의 필사실 책상에서 글을 베껴 쓰는 따분하고 지루한 소임을 받은 수도승의 숨겨둔 상상력이 엿보인다. 그렇다. 그는 그림을 업으로 하는 화가들처럼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다해 필사하며 글의 행간을 읽고 또 읽고 곱씹고 또 곱씹었으리라. 수도승의 그림은 짐짓 왕 중의 왕,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의 탄생을 축하하는 동방박사의 방문은 무릇 이러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먼 길을 찾아와 경배할 세상의 구원자, 아기예수는 이 수도승의 생각에는 "모든 이"의 하느님이어야 했나보다. 수도승은 자신이 알고 있는 만큼의 온갖 인종을 모두 작은 화면에 그려 넣었다. 하얀 피부의 백인, 검은 피부의 꼬불꼬불한 머리의 흑인, 그리고 중동에서 온 듯한 황색피부의 아시아인. 분명 수도승은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필사하며 단지 글자를 그려 넣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행간 중 발견한 진짜 세상의 구원자를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글자가 아니라 자신이 생각한 세상의 구원자, 하느님다운 하느님을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나보다. 온 인류, "모든 이"의 구원자 말이다.

저 높은 밤하늘의 상서로운 별빛을 쫓아 찾아온 이들은 언어도 문화도 그리고 생김새도 달랐지만 오직 한 사람을 만나러 먼 길을 돌아왔다. 그 먼 길을 찾아와 만난 아기예수의 미소에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차별 없고 편견 없는 평등이고 분노 없고 다툼 없는 평화이고 공평하고 올곧은 정의이며 꼭 안아주는 사랑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어갈 희망이었으리라. 피부도 언어도 이 세상의 구원자를 경배하는 자리에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으리라.

먼 길을 돌아 찾아온 다른 얼굴, 다른 언어의 우리 주위 수많은 동방박사들은 이 땅에서 무엇을 만났을까? 그 옛날 동방박사들이 발견한 기쁜 소식, 그 해맑은 얼굴의 아기예수를 그들도 만날 수 있을까? 성탄의 따듯한 불빛에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이 생각나 눈물지을 이 땅의 수많은 동방박사들이 이번에는 꼭 참 기쁜 소식, 참 하느님, 참 구원자를 선물 받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