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7일 연중 제21주일
마태오 16, 13-40
신분제가 강고하던 조선시대에도 가면극과 같은 해악이 있었습니다. 정월 초하루, 또는 단오와 추석 등 명절날 마을 어귀에서 펼쳐지던 이 아랫것들의 놀이에서는 현실에서 배알이 꼴려도 머리를 조아려야했던 윗것들을 통쾌하게 조롱할 수 있었습니다. 사대부들의 근엄한 걸음이 똥 싼 아랫도리로 걷는 어기적 걸음으로 묘사되어도 그날, 그 공간에서의 일들을 윗것들은 노여워하거나 참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거만하고 탐욕스러운 사대부, 고기와 주색을 탐하는 파계승, 못난 임금 등 세상의 모든 ‘권위’는 그 자리에선 죄다 우스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서민들은 주리고 매 맞고 고단했던 거친 현실을 이렇게라도 조롱하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에는 더욱 풍자적이고 선동적인 내용들로 채워졌다고 합니다. 여전히 놀이라는 형식에 담겨졌지만 이제 그것은 단순한 분풀이만이 아니라 무능하고 무도한 임금과 특권계급을 향한 비판과 저항이었던 것입니다. 해악의 진정한 힘은 어쨌든 현실의 가혹함을 진지하게 받아치지 않고 오히려 웃음거리로 만들고, 직설적이지 않은 에두른 암시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노와 억울함을 그 어떤 말로도 다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웃음기를 머금은 채, 넌지시, 낮게 돌려 말하는 소리가 크게 내지르는 함성보다 오히려 권력자들의 간담을 더 서늘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치 긴 연설문보다 때론 간결한 몇 구절의 시가 더 명징하고 웅변적인 것과 같습니다.
오늘의 복음 안에도 해악이 있습니다. 복음에서 베드로는 스승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고백이 나온 장소가 의미심장합니다. 카이사리아의 필리피 지방. 이곳은 헤로데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받은 땅위에 건설한 도시로 황제를 기념하기위해 그 이름도 황제(cesare)를 뜻하는 카이사리아(cesarea)로 붙인 곳입니다. 항구에 면한 도시로 해상무역은 물론 제국의 주요 도시들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자 로마군단의 주둔지, 로마제국의 팔레스타인 지역 행정중심지였습니다. 공히 황제의 도시라 불러도 좋을만한 그런 도시였던 것입니다. 해악은 바로 이 이름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절대 자신을 황제라 칭하지 않고 다만 존엄자(Augustus)라 칭했습니다. 로마가 어디까지나 공화국(respulica)임을 형식적으로라도 지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황족은 모두 황위에 오르는 순간부터 ‘살아있는 신의 아들’로 숭배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황제의 도시에서 황제에게만 돌아가던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란 칭호를 황제가 아닌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 젊은 유대 청년에게 돌린 베드로의 고백은 그야말로 도발적이고 불온한 해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 전체가 해악이었던 사람도 있습니다. 찰리 채플린. 1889년 4월 16일 태생인 그는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던 시절 활동한 그는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과 같은 죄악으로 얼룩진 세상의 허위를 해악으로 날카롭게 비판하였습니다. 전쟁과 학살이라는 엄청난 무게의 고통에 짓눌린 현실을 그는 그렇게 위무했던 것입니다. 1940년 ‘위대한 독재자’라는 제목으로 나온 최초의 유성영화는 자신보다 나흘 늦게 태어난 동시대인 히틀러를 희화한 것입니다. 나치와 독재자를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면서 그들이 건설하고자하는 ‘제국’의 허상을 보란 듯이 조롱하였습니다. 영화 말미의 연설 장면은 길이 남을 명연설입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동년배 히틀러가 걸었던 길보다 더 위대한 길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힙니다. 그의 생 자체가 인류가 가장 형편없이 일그러지고 잔인해진 시절에 대한 해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대인이지만 전혀 다른 경로를 살았던 두 인물을 통해 우리는 황제의 도시에서 전혀 다른 황제의 모습을 선언한 우리 스승이 무엇을 말하고자했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이 작성되던 80년경은 로마제국이 여전히 시퍼렇게 건재하던 시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70년 유대전쟁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유대 동포들에게 매국노로 몰려 회당과 공동체로부터 쫓겨나기 시작하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제국으로부터는 국론을 분열하는 집단으로 취급받고, 동포로부터는 배신자로 추방되던 이들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입을 통해 고백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고백은 핍박받고 쫓겨나던 그때 당시의 신앙인 모두의 고백인 것입니다. 제국의 형틀에 매달렸던 스승이 그들에게는 황제요, 스승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동포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황제는 무력이 아닌 자비로 다스리는 평화의 군왕이고, 그 메시아는 낡아빠진 규정과 계명으로 사람을 옥죄는 종교권력이 아닌 자신을 바쳐 타인의 목숨을 살리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들은 그제야 알았던 것입니다. 고단한 시절이 지나가면 유대백성들이 그렇게도 기다리던 메시아, 만왕의 왕으로 자신들에게 한자리 내줄 줄 알았던 스승이 왜 그토록 어이없이 죽었는지를 비로소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가 선택한 길은 지배가 아니라 봉사이고, 군림이 아니라 섬김이며, 규정과 속박이 아니라 해방과 자유라는 사실을, 무력이 아니라 평화이고, 권위가 아니라 눈물겨운 희생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복음의 핵심은 지금까지 이 복음만 등장하면 흔하게 듣던 베드로를 반석 삼아 그 위에 지었다는 교회나, 이 교회의 수장은 사도의 으뜸인 베드로라는 해석 따위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고백, 그분에 대한 나의 고백인 것입니다. 스승은 에둘러감 없이 돌진해 들어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복음 말미에 자신이 그리스도란 사실을 함구하라는 스승의 명령은 이 고백이 누가 가르쳐준 것을 똑같이 따라하는 것으론 진짜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승은 제자들이 우선 자신이 걸었던 어둠과 고통의 시간을 함께 걷길 원했던 것이고, 그 길 끝에서 자신을 온전히 만나 스스로 고백하길 바랐던 것입니다.
정보화 시대의 첨단을 살고 있습니다. 정보가 지식이고 곧 힘이기도 합니다. 복잡해진 세상만큼 다양한 매체를 통한 수많은 정보들이 쉴 사이 없이 생산되고 소멸됩니다. 먼 이역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하고 간단한 검색으로 최신 지식을 손쉽게 획득합니다. 편리해졌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수집된 정보들이 과연 진실과 부합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고, 오랜 시간 밤을 지새우며 숙고해 이룩한 학문적 성과들의 노고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된다는 사실입니다. 많이는 알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럴 듯하지만 내실이 없습니다. 앵무새처럼 남들 말을 흉낸 내지만 정작 제 말은 없습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니 딱히 부담도 느끼지 않습니다. 아니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말은 어느새 그렇게 가볍고 무책임하며 천박해졌습니다. 그러나 자고로 말이란 그 사람의 인격을 담는 그릇입니다. 뱉는 순간 흩어지지만 그 말 위에 성현들은 수도 없이 보낸 불면의 시간과 노고와 자신의 인격을 실었습니다. 말은 무릇 한 사람의 생이자 다짐이고, 이상이자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성현들이 말을 아꼈던 까닭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정보에 대한 질문입니다. 제자들의 답변은 거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더 깊숙이 파고들어 도망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남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대답이 불가능합니다. 정보가 아닌 인격, 나와의 관계를 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베드로의 입을 통해 선포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사실 마태오 복음이 작성되던 당시 신앙인들의 고백이자 교회의 고백이기도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나의 고백”일 순 없는 것입니다. 강론에서 떠드는 이야기나 교리책에서 배운 예수나, 또는 고급스런 강의에서 들은 것들 모두는 이 질문에 무용할 뿐입니다. 나에게 그분은 누구입니까. 나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정보가 아닌 인격으로 다가오는 스승을 나는 어떻게 만났고 또 무어라 고백하고 있는지 먼저 물을 일입니다. 무력이 아닌 평화로, 권위가 아닌 겸손으로 기꺼이 어둠의 심연을 걸었던 스승을 나도 뒤쫓고 있는지 물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질문에 온전히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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