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다 (강론)

예수라는 서사 敍事 (2017년 8월 6일 연중 제18주일 거룩한 변모 축일)

바깥 주인장 2017. 8. 5. 23:18

2017년 8월 6일 연중 제18주일 거룩한 변모 축일

마태오 17, 1-9


꿈인지 생시인지. 간혹 지난날이 아득한 꿈같고 어젯밤 꿈이 더 생생한 현실 같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 속 제자들이 목격한 스승의 변모는 어쩌면 부질없는 잠깐의 환시 같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꼭 꿈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없겠습니다. 스승이 스승의 말대로 정말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스치듯 지나간 오늘의 장면이 현실이고 역으로 사람들의 반대와 배고픔, 정처 없이 떠도는 고단한 현실이 긴 꿈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엘리아, 기라성 같은 신앙의 선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스승의 빛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제자들은 어떤 생각에 잠겼을까. 대단한 사람 같긴 한데 확신까지는 가질 수 없었던 지금까지의 스승, 그러나 이제 자신을 모두 맡겨도 좋다는 마음을 먹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또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늘 쫓기듯 다니면서도 얻은 것도 이룬 것도 딱히 없는 지금까지의 처지가 허망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맨 마지막, 피할 수 없는 질문 하나가 있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인가! 신의 아들인가, 아니면 한낱 인간인가. 고통 후의 영광인가 아니면 영광 후의 몰락인가. 대체 이 사람의 실체는 무엇인가! 

 

예수의 생애는 2독서 베드로 사도의 지적처럼 신화나 영웅들의 서사와 많이 닮아있기도 합니다. 간난신고 끝에 금위환향 하는 영웅들처럼 그도 죽음이라는 극한의 고통을 거쳐 부활에 이르렀습니다. 또는 본디 고귀한 혈통이지만 몰락을 경험한 후 다시 권좌를 되찾는 영웅담의 레퍼토리처럼 오늘 제자들이 목격한 빛나는 모습도 그의 고귀한 혈통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스승의 여정이 여느 영웅들의 생애와 같은 것일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처한 고난, 수난의 자발성입니다. 영웅은 운명의 얄궂은 장난으로 몰락합니다. 자처해 권좌에서 내려오지도 영광을 스스로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몰락은 쓰라리고 그 시간은 절치부심인 것입니다. 그러나 스승의 몰락은 다릅니다. 스스로 추락하길 결심한 사람처럼 산 위의 환영이 끝나자마자 자신이 걸어야할 고난의 길을 제자들에게 재차 강조합니다. 그날만이라도 영광의 모습을 본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초치는 소리는 하지 않아도 좋았으련만 서둘러 내려오는 산길처럼 앞으로 닥칠 역경을 다시 상기시킵니다.


실제로 성서는 스승의 여정을 늘 이런 구도로 그려왔습니다. 빛나는 산 위에서의 환영이 끝나기도 전에 거역할 수 없는 수난 예고가 뒤따라오고, 마치 개선장군처럼, 왕들의 귀환처럼 백성의 환호를 받으며 시작된 예루살렘 입성 장면이 끝나기 무섭게 수난기가 펼쳐집니다. 이런 구도는 예수가 짊어진 고난이 얄궂은 운명으로 몰락하게 되는 영웅들의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그에게 필연이고, 빛나던 산 위의 영광스런 모습과 더불어 모두 그의 본디 모습임을 웅변합니다. 영광도 고통도 모두 그의 실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종료된 본당 여름강좌 중 강사 신부님이 강조한 십자가라는 상징의 파격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십자가는 지금의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거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치범과 같은 중범죄를 다루는 제국의 사형도구였습니다. 따라서 사형수의 추종자들의 입장에서는 수치이고 고통스러운 기억이며 추문이었습니다. 지우고 싶은 기억, 깊이 팬 상처입니다. 4세기에 이르러서야 십자가가 서서히 교회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충격적이고 수치스러운 표식이었는지 짐작 갑니다. 몰락한 스승, 그것도 극형으로 목숨마저 잃은 스승을 떠올리게 하는 십자가는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쳐지는 물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십자가가 그리스도교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다는 것은 참 기괴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음미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초세기 신앙인들이 십자가를 그리스도의 대표 상징으로 이해하고 사용하기 시작한 4세기, 300년대는 바야흐로 박해가 끝나고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종교로 인정받는 시기였습니다. 아마도 그때의 신자들은 긴 밤이 끝나고 찾아온 여명의 아침처럼 어제의 서러움을 뒤로하고 개선하듯 한껏 부풀어있었을 겁니다. 과거 모질게 굴던 이들을 한번에 지워버릴 수 있을 만큼의 특권과 세상의 인정을 거머쥔 시기. 십자가 따위는 저 뒤로, 장롱 속에 숨겨둔 부끄러운 일기처럼 잊어도 좋을 시기였습니다. 실제로 당시 그려진 예수의 모습은 세상을 발아래 둔 황제의 모습으로 그려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십자가를 잊지 않았습니다. 수치와 고통의 기억인 십자가를 자신들의 가장 대표적인 표식으로 삼았습니다. 승리에 도취해도 좋았을 시기, 도대체 왜 그들은 십자가라는 추문을 다시 꺼내든 것일까.


스승을 잃은 것은 말문이 막힐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겠지만 아마도 그들은 서서히 스승의 삶을 다시 되짚고 곱씹으며 그가 걷고자한 길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았을 것입니다. 빛나던 모습의 스승만이 그의 진짜 모습, 실체가 아니라 그가 자처한 고난과 죽음, 스스로 선택한 몰락의 길 역시 그임을 분명 깨달았을 것입니다. ‘자처한 고난’이라는 이 기괴한 여정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스승의 메시지를 그제야 이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자가를 자신들 믿음의 대표 상징으로 여긴 초세기 그리스도인들. 그 행위는 동시에 일종의 장엄하고 비장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여느 왕과 영웅처럼 또는 오늘날의 정치인들처럼 예기치 않은 시련에 몰락했다가 살아 돌아온 길이 아니라, 그래서 군림하고 지배하고 명령하는 길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빛나는 신의 모습을 벗고 인간이라는 허망한 운명에 뛰어든, 자신을 내어놓고 지워버림으로써 오히려 부서진 이들을 일으키고 병든 이들을 치유하며 갇힌 이들을 해방하는 스승이 택한 경로를 자신들도 걷겠노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수치스러운, 어리석은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가겠다는 결심인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신앙은 무언가를 획득하기 위한 애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힘을 빼고 낮아지고 내놓는 부단한 내려감입니다. 아름답고 황홀하게 빛나던 산위에서의 시간을 다시 찾기 위해 열심히 달리는 것이거나, 아예 그 곳에 눌러앉음이 아니라 오히려 초막을 짓겠다는 제자를 만류하고 산길을 재촉해 다시 도성을 향해 내려오는 ‘떠남’입니다. 초막, 베드로가 지어 바치겠다는 그것은 그래봐야 얼기설기 가지로 엮은 임시거처입니다. 그 잠시의 머묾조차 허용치 않은 스승. 숨이 막히기도 합니다만 그것이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내려가길 멈추지 않는 사람, 내려놓고 떠나길 주저하지 않는 사람, 자신마저 남김없이 지워비릴 운명, 그것이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어렵지만 그렇습니다. 겸손, 희생, 봉헌. 너무 묵직해서 껴안기 힘든 이 말들, 그러나 그게 우리의 길입니다. 딱하지만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고백입니다만 마음 속 갈등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신자분들이 하느님도 만나고 힘도 얻게 할 수 있을까. 사실 스승이 던진 저 어려운 말들은 말 그대로 어렵습니다. 먹고 자는 걱정 없이 사는 저 같은 사람에게도 그 말들은 버겁고 힘겨운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겸손, 희생, 헌신 같은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곤혹스러운 것은 그럼에도 그 말들을 신자들 앞에서 해야 하는 제 팔자입니다. 녹록치 않은 세상살이, 더러는 가정과 직장의 어려움, 당장의 생계, 인간관계 등으로 지치고 너덜 해졌을 마음들, 그래도 시간을 쪼개 찾아온 이 시간에 견적도 않나오는 이야기를 들어야하는 신자분들의 입장을 헤아린다면 차라리 가볍고 즐겁고 위안되는 이야기만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라면, 산위의 아름다운 모습만 기억하는 자리, 그런 것은 이 성전 밖에도 많습니다. 치유, 여백, 쉼을 강조하는 요즘 세상이라면, 이 성전에서의 말들은 더 더욱 다른 말이어야겠습니다. 이 신앙 공동체의 말은 분명 다른 언어입니다. 그 말은 말씀, 곧 스스로 인간이 되어 온 생을 걸쳐 쓰고자했던 스승의 말이어야겠습니다. 영웅과 왕들의 서사와 결코 같을 수 없는 이야기가 하느님이 스승 안에 펼쳤었고, 그리고 지금도 펼치고 계시는 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을 위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의 길을 내려와 고통의 길을 자처하는, 이로써 더 참된 영광을 완성하는 드라마 말입니다.

헌신은 고귀한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이름도 지우고 온전히 이웃을 위해 봉헌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삶만큼 심금을 울리는 일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 그 마음의 동요는 무엇일까. 그 감격은 필시 이미  우리들 속에 새겨진 우리의 본모습, 내 안의 ‘하느님 닮은꼴’이 다시 기억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빛나는 저 산위의 스승, 그러나 다시 세상을 향해 성큼성큼 내려오는 그 뒷모습이 내 마음 속에서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나 역시 그 순간 거룩하게 변모하는 것입니다. 힘을 냅시다. 아니 힘을 내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멈추지 않기를, 매일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이 ‘거룩한 변모’를 멈추지 않길 희망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