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다 (강론)

그 밤은 모두의 밤이다(2017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일)

바깥 주인장 2017. 8. 13. 01:18


2017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일

마태오 14, 22-33

 

오늘 복음은 오병이어의 기적 다음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오천 명을 먹인 기적과 물위를 걷는 기적은 신자라면 누구나 몇 번은 듣고 묵상했을 사화입니다. 그러나 워낙에 유명한 이야기가 연속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미쳐 놓치는 것들도 있습니다. 강론을 준비하며 이번에 유독 제 마음을 붙든 것은 이 기적이 일어나던 시기 예수가 겪었던 감정과 처지입니다. 소소한 치유 기적도 아닌 엄청난 규모의 무리에게 베푼 기적이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예수가 메시아로서의 자신의 신원에 확신이 가득했을 시기처럼 보이지만, 당사자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친척이자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자신과 같은 길을 걷던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들은 무척 심난한 상황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그에게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위협으로 다가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슬픔과 두려움, 운명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충동 등으로 혼란스러웠을 그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높은 산은 성서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라지만 예수는 분명 그 산위에서 무척이나 복잡한 심경이었을 것입니다. 운명의 가혹함, 임박한 죽음의 실제적 공포, 그러나 완주해야할 자신의 길 사이에서 번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 감정에 충실할 사이도 없이,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할 겨를도 없이, 홀로 몸을 피해 기도하던 산까지 그를 찾아 몰려든 군중. 그들을 바라보던 예수의 심정은 또 어땠을까. 자신의 감정을 돌볼 사이도 없이, 그는 허기진 배로 돌아갈 사람들을 먼저 걱정합니다. 한없는 연민의 소유자. 우리 스승은 어찌 이토록 따듯할까 싶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러곤 오늘 복음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여기서도 제 시선을 붙든 것은 제자들을 배를 태워 먼저 보낸 후 사람들을 일일이 전송하는 장면입니다. 대개 윗사람이 먼저 자리를 뜨고 아랫사람이 뒤처리를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반대입니다. 선두에서 호령하는 이가 아닌 처지고 쓰러진 이들을 손수 추슬러 함께 걷는 이, 이 스승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 사후, 스승의 생전 모습을 회고하며 기록한 오늘 복음의 저자는 필시 이 부분을 놓칠 새라, 거대한 기적사화에도 이런 사소한 정황의 묘사를 빼놓지 않은 것입니다. 복음사가의 스승에 대한 이러한 인간적인 묘사는 스승이 결코 어떤 거대한 이념이나 사명만을 위해 앞만 보고 질주하는 분이 아니었다는, 그리고 그가 선포하던 그 ‘하느님 나라’ 또한 결코 유토피아나 신념의 목적지가 아닌, 오히려 매일 대면하는 일상의 만남과 사건들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 것임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스승의 자상함과 헌신에 제자들이 무엇을 느꼈을 것이며 또 얼마나 그런 스승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보면 그들이 새삼 부러워집니다.


모두 떠나보내고 스승은 다시 홀로 밤이 깊어지도록 기도합니다. 엄습해오는 죽음의 시간에 얼마나 깊은 고뇌와 번민을 거듭했을까 짐작해봅니다. 어두운 호수, 역풍을 만나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배 안의 제자들의 처지는 번민하는 예수의 마음과 닮아있습니다. 피하고 싶은 죽음,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운명 사이에서 방황하는 밤입니다. 이 어두운 호수 위는 분명 수난 전의 이야기이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예수가 떠난 이후 제자들이 맞이할 막막한 상황이고, 오늘을 사는 우리가 매일 직면하는 절망적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 밤은 모두의 밤인 것입니다.


이 절망의 시간 위로 예수가 걸어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마라” 용기는 무엇인가. 또 두려움을 떨쳐버릴 믿음은 무엇일까 질문해봅니다. 먼저 베드로를 주목해 봅니다. 참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아둔하고 단순한듯하지만 돌이켜보면 결정적 순간에 예수가 진정 누구인지는 매번 모두 그의 입을 통해 고백되었습니다. 오늘도 그는 어찌 보면 두려움과 막막함에 휩싸인 스승을 다시 일깨우는 작지 않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가 다름 아닌 ‘스승’이고, 죽음을 넘어 더 큰 하느님의 계획을 향해 가고 있는 존재란 사실을 다시 알려준 것 역시 이번에도 아둔한 제자 베드로입니다.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 명령하십시오.” 베드로의 이 완전한 위탁이 오히려 스승을 깨웠고 용기 내게 만든 것입니다. 물에 빠져들기 시작한 제자를 건져내는 것은 분명 스승이지만 실제로 물에 빠진 것은 스승이었고 이를 건져낸 것은 제자인 베드로인 셈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말한 것은 스승이지만 정작 용기를 얻은 것은 스승인 셈입니다. 스승을 스승답게 만든 제자라니, 두근거리는 대목입니다.


용기는 어떤 용맹함을 가진 자가 발휘하는 기백인 듯 보이지만 실상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막다른 골목처럼 더 이상 피할 곳 없는 처지에서 시작되는 간절한 위탁에 가까운 것입니다. 전적인 내어맡김, 믿음입니다. 베드로의 믿음과 고백 역시 배운 것 많고 가진 것 많은 처지에서 터져 나온 것이 아니라 기댈 곳 없고 피할 곳 없는 호수 위, 절망의 한복판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완전한 위탁, 가진 것을 모두 잃은 처지에서 유일하게 남은 마음 한 조각, 간절함이 믿음인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믿음이 약하거나 신앙이 얕다는 말 따위는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그런 표현은 나로써 아직 건재하며 나로써 충분하다는 고백인 셈입니다. 내가 나로서 약해질 때, 철저히 무력해지는 순간, 바다 한 가운데 떠있는 부표처럼, 칠흑의 어둠 저 편의 빛줄기처럼 유일하고 간절한 마음이 우리의 믿음이고 용기인 것입니다. 이 어두운 호수 위에서만이 우리는 비로소 그렇게 ‘나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진 자는 잃는 것이 두렵지만, 잃을 것조차 없는 사람은 두려움마저 없습니다. 가진 자는 자신으로 충분하기에 앞날을 계산하고 관리할 따름이지만, 가진 것 없는 홀가분한 자는 그저 내어 맡길 뿐입니다. 전자의 사람에게는 지키는 것이 삶의 목적일 테지만 후자의 사람은 당장의 소유가 아닌 다가올 무수한 날들을 그의 것으로 삼습니다. 전자의 사람이 도달하는 곳이 기껏해야 안락한 삶이라면 후자의 사람이 품는 꿈은 저 장대한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계획하는 자가 결코 희망하는 자를 이길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늘 저 빼앗길 수 없는 희망과 불패의 용기만을 지닐 수는 없는 법입니다. 세상이라는 어둔 호수를 건너다보면 맞바람을 만나 주춤하고 두려움에 휩싸이기 일쑤입니다. 물위를 걷다가도 돌연 공포에 휩싸여 빠지고 마는, 그 숱한 장엄한 신앙고백을 뱉어낸 입으로 스승을 세 번이나 배신한 베드로처럼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합니다. 그가 결국 가장 위대하게 스승을 고백했고 목숨마저 내어 받친 교회의 밑돌이 되었단 사실을. 따라서 관건은 두려움과 공포, 나약한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 공포와 두려움을 없애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잊지말아야하는 것은 자주 공포에 휩싸이고 두려움에 떨고 마는 이 힘겨운 세상살이가 번민하던 인간 예수가 어엿한 스승, 완전한 하느님으로 변모하고, 제자가 스승을 ‘유령’이 아니라 ‘구원자’로 알아보게 되는 ‘어두운 호수’란 사실입니다. 두려움의 끝, 절망의 절망에서 우리는 마침내 하느님을 만나고 그 하느님께 나를 모두 맡길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가진 것이 여전히 많다는 것입니다. 아니, 가진 것을 믿는 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을 입술로 고백하지만 정작 내가 믿는 구석은 따로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명예, 재산, 사회적 지위와 환경, 직업, 그것이 무엇이든 그런 것들로 무장한 내 앞에 주님은 허깨비일 따름입니다. 어쨌거나 내가 믿는 것은 나, 내가 소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굳건한 믿음은 두려움 없는 용맹스러움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지워버린 연후에, ‘내’가 완벽히 무력해지는 순간 차오르는 간절함, 내어맡김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소유한 것들이 아니라, 오로지 그분만이 내 유일한 출구이자 희망임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느님은 우리를 건져 올리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