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일기(칼럼)

‘어린지(Orange)’ 그리고 약자들의 언어(외국인노동자 2010 10)

바깥 주인장 2010. 10. 17. 21:18

‘어린지(Orange)’ 그리고 약자들의 언어

 

장동훈 신부

 요즘 이태석 신부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가 자주 화젯거리로 오르내린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는 어머니부터 (난 아직 닭이 똥 싸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 선교사의 삶이 그리 어려운건지 몰랐다고 말하는 친구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이 끼치는 영향과 함께 그 이야기를 전하는 매스미디어의 힘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난 아직 보지 못했다. 영화 속 배경이 되었던 곳이 수단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몇 년 전 하던 공부를 접고 수단으로 선교하러 떠난 선배신부가 아련히 떠오를 뿐이다. 얼마 전 부친상 때문에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선배에게 무엇이 가장 힘들었는지 물으니 더위도, 열악한 환경도 아닌 ‘언어’라고 대답한다. 영어뿐만이 아니라 지역 토착 언어와 함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슬림들의 언어인 아랍어도 할 줄 알아야한다고 한다.

 

하기야 사람을 만나려면 말을 할 줄 알아야하는 것이 가장 우선 요건일 것이다. 하지만 말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배워지지 않는다. 말은 자고로 단순히 소통을 위한 ‘음성기호’ 그 이상의 의미와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유학을 시작할 당시 ‘말’을 배우는데 들였던 수고와 ‘말’을 알아듣고 구사하기 시작했을 때 느끼던 감정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위한 통로를 갖는 것과 같다. 낯선 언어를 구사하는 상대방의 문화와 역사가 더 이상 뭉뚱그려진 ‘낯선 음성신호’가 아니라 ‘구체적 서사’로 다가올 때 진정 ‘말을 배웠다’ 하겠다. 삶이라는 질곡의 바퀴가 굴러가며 내는 소리가 바로 인간이라는 ‘서사’를 지탱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이라고 다 같은 말은 아니다. 이명박 정권 인수위에서 ‘어린지’라는 요상한 발음(Orange의 ‘고상한’발음이란다)으로 뭇 백성의 원성을 샀던 숙대 총장처럼 많은 이들은 힘 있는 자들의 언어만을 배우려한다. 강자의 말을 배워 강자가 누리는 ‘권력’을 얻고자 하는 것이 우리들 '언어 시장'의 본질이다. 어느 누구도 ‘불법’과 ‘단속’이라는 낙인으로 동분서주해야하는 힘없는 이들의 언어를 배우려하지 않는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돕고’ ‘베푸는’ 강자의 위치만을 점유하고 싶은 것이 요즘 한국천주교회 이주사목의 방향이 아닐까 싶다. 약자들 삶의 ‘서사’를 이해하려는 것 보다 정부가 표방하는 ‘다문화사회’ ‘사회통합’ 따위의 빛 좋은 개살구를 채워주는 역할을 자처하는 듯 보여 유감스럽다.

 

11월 13일, 평화시장의 어린 ‘미싱시다’ 동생들을 위해 풀빵을 사다주던 전태일의 서사가 산화한지 꼭 40년 되는 날이다. 노동자들이 받던 부당한 대우에 분을 삼키던 그가 자신들의 서사를 이해해줄 대학생 친구 하나를 간절히 원했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사회 하부를 지탱하던 그때, 그 약자들의 언어가 이제 다시 ‘단속’으로 하루도 편할 날 없는 이주 노동자들의 언어가 되었다는 사실에 여전히 전태일의 ‘서사’는 ‘진행형’이다. 과거 약자들의 입이 되어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뿐만이 아니라 “스스로 이야기가 되고자 했던” 이 땅의 그 많던 선한 이들은 다 어디를 갔을까? 전태일이 일하던 청계천의 평화시장 앞 다리를 ‘전태일 다리’로 명명하는 것이 과거 약자들의 언어가 되어주고 스스로 그들의 언어가 되었던 이들의 추억담 같은 ‘기념탑’으로만 남지 않기를 기도해본다.

이주사목을 담당하는 타 교구 신부님의 전화통화를 엿들었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전화기 너머로 흘러나오고 또 한마디도 알아 들 을 수 없는 말로 응수한다. 그때 들은 말은 캄보디아어란다. 난 한마디도 못 알아들었다. 단 한마디도... 전태일이 안타깝게 기다리던 ‘대학생 친구’가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