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24일 성령강림대축일
요한 20, 19-23
교회의 기원을 언제로 알고계십니까. 성령강림이지요. 그런데 그 중요한 날이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도 아니고, 승천도 아닌, 유대인들에게 잡히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불안한 공동체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우선 오늘 말씀의 전례 전체에 흐르는 맥락을 짚기 위한 상징들을 찾아보겠습니다. 몇 개의 상징들이 짝을 이루어 등장합니다. 예를 들자면, 1독서의 성령강림의 장면은 저 옛날 바벨탑을 쌓던 인간들의 언어를 여러 개로 흩었던 사건을 떠올립니다. 하나의 언어를 여러 개로 흩어버린 하느님이 다시 여럿의 언어이지만 서로 알아듣게 만듭니다. 두 번째 상징은 오순절이라는 절기입니다. 고래로 유대인들에게 이날은 파스카 후 7일이 7번 오는 날 지내는 농경축제의 일종인 사보웃(shabout)축제였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시간에 부여하던 전통적 의미가 오순절, 곧 교회의 기원이라는 새로운 뜻을 획득하게 됩니다. 마지막 상징은 복음에 나타납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을 파견하며 "숨을 불어"넣으시는 모습은 첫 사람들의 코에 숨을 불어 넣어 생기 있게 했던 창세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세 개의 낱말, 언어, 시간, 인간은 대조를 이루며 새로운 뜻을 얻게 됩니다. 이 세 단어가 가리키는 방향은 모두 하나, 곧 재창조, 거듭남입니다. 요즘 말로 리셋(reset)이라 말할 수 있고 조금 더 신학적인 말로는 제2의 창조입니다. 제2의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에서 이 재창조가 정점을 찍습니다.
누구든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며 다시 시작했으면 하는 마음을 먹기 마련입니다. 한번쯤은 이 따위 엉망인 세상 제발 망하고 새 세상이 왔으면 꿈꿔보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살아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후회와 낭패만큼 인간 그 자체와 인간의 시간을 함축하는 단어는 없을 것입니다. 더 길게 본다면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강론을 준비하며 바벨탑 사건을 찾아보니 예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사실들이 새삼 보입니다. 창세기 저자는 바벨탑을 쌓는 이들이 돌 대신 벽돌을 구워 탑을 쌓았고 더 이상 진흙이 아닌 역청을 사용했다 보고합니다. 벽돌과 역청은 인간 문명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과학과 기술이라는 인간만이 영위하는 무한한 잠재 능력의 발견입니다. 문명의 이기는 분명 말뜻처럼 인간에게 이로운 도구이지만, 현실에서는 그 사정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생명을 먹여 살리는 농기구와 농업기술이 발전했지만 그와 더불어 인간의 생존을 위해 무수한 자연이 파괴되었습니다. 의술의 발전과 동시에 목숨을 빼앗는 살상무기들이 고안되었습니다. 실로 인간의 역사는 전쟁과 분열의 역사입니다. 인간 이성의 출현은 다른 의미로는 신이라는 후견인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인간 원형, 아담과 하와 죄로 초래된 것은 추방이라는 징벌과 함께 창조주의 후견을 떠난 인간의 독립을 의미하니, 인류문명사적 관점에서는 긍정으로 평가될 수 있겠습니다.곧 여자는 출산으로 남자는 노동으로 징벌을 받지만, 그것은 동시에 인류라는 문명을 일구어갈 가장 기초적인 도구, 곧 노동력과 노동인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투쟁과 아귀다툼의 생존이 시작되었으니 징벌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쌓아올렸지만 또 쉼 없이 무언가를 파괴했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인간의 역사에 여러 차례 직접 개입하십니다. 끊어진 것을 이어붙이고, 틀어진 것을 바로 잡고, 쓸모없는 것을 지워버리십니다. 노아의 홍수가 그랬고 바벨탑의 사건이 그랬으며,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이 그랬습니다. 늘 다시 시작하라는 백지 시험지를 지치지도 않고 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손수 인간이 되어 우리들 사이에서 새로운 사람의 모습, 재창조된 인간의 원형을 사셨습니다. 그 새로운 아담이 인류를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려 숨을 불어넣은 날,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령강림입니다. 조율의 날,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창조가 맨 처음으로의 원상복귀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노아와 바벨탑 사건이 죄로 얼룩진 인류를 흩어버리고 지워버린 처음 상태로의 복원과 유사하다면, 성령강림을 통한 새로운 창조는, 오히려 의기소침한 아들을 토닥여주는 어미의 위로와 아버지의 격려를 닮아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생식기를 드러내고 천방지축 뛰어다니던 에덴의 첫 인간의 백치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앞으로 짊어질 지상의 시간에 대한 책임을 부여합니다.
왜 그런지 이유를 뜯어보겠습니다. 우선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축원한 '평화'의 의미를 봅시다.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로 이해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평화라 할 수 없습니다. 평화란 전쟁이 일어날 원인이 사라진 상태, 곧 틀어지고 망가진 것들을 바로잡는 '정의'의 개념과 쌍을 이루어야 완전한 뜻을 이룹니다. 하느님의 평화는 전쟁과 분열, 갈등과 이견, 불평과 비판이 없는 획일적인 무엇, 파쇼적인 무엇이 아닙니다. 강력한 독재자 앞에서 사람들은 두려워 입을 닿습니다. 아무도 그런 상태를 평화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평화란 오늘 독서처럼, 방언을 다양한 자기 지방말로 알아듣는 것과 같이 서로 다르지만 "더불어 살 능력"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선사한 하느님의 평화는 각기 다른 의견을 조율하고 잘못된 것, 불의한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능력, 곧 정의와, 공존할 능력에 관련된 것입니다. 우격다짐으로 강요한 침묵은 거짓 평화요, 반복음적 평화입니다. 갈등은 따라서 피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지나친 것을 새겨보고, 놓친 것을 다시 보고, 잘못된 것을 알아보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두려워 떨던 제자들에게 전해준 부활한 예수의 평화는 두려움을 일시 잊을 망각의 구름 같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닫힌 문을 열고 평화를 일구러 밖으로 나가야하는 "행동이 수반된 평화"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의 평화는 감정의 영역이 아닌 실천의 영역에 해당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평화를 축원하며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는 "파견"은 이 복음적 평화가 고요하고 정적인 평화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뜨거운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평화로워지려면 평화롭게 만들어야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마음에 고이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고 이를 위해 진력해 살아가는 "책임성"과 "지속성"에 관련된 것입니다. 앞으로 살아갈 인간의 시간, 인류의 지상 여정의 평화가 우리 손에 "맡겨진 것"입니다.
새롭게 창조된 인간이 마지막으로 받게 되는 것은 용서의 능력입니다. 복음 말미에 예수는 우리에게 타인의 죄를 용서할 능력을 부여합니다. 그렇다고 이 능력이 내가 너를 용서한다는 단순한 이야기나, 한낱 인간인 사제에게 죄를 고해할 고해성사의 근거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느님의 시선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예수를 아무리 뜯어봐도 예수는 단죄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명백히 죄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상황이었던 간음한 여인 앞에서도 그는 단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시는 죄짓지 말라 타일렀습니다. 죄지은 인간을 미워한 적도 또 단죄한 적도 없습니다. 오직 격노해 독설을 퍼붓던 것은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옥죄는 이들, 죄를 규정하고 죄를 판단하는 것이 '업'이었던 율법주의자들과 바리사이와 같은 근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사실 그때조차 예수는 그들을 단죄했다가 보다는 그들이 지닌 편협함, 곧 꽉 막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 조차도 다시 시작할 여력을 주지 않는 협소함이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는 사람은 넘어져도 일어나고, 절망에도 희망하며, 폐허에서도 다시 집을 짓고,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그런 존재라고 다시 알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애써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나 봅니다.
이 용서의 능력은 평화의 능력과 연결됩니다. 반대나, 다른 의견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품을 수 있는 능력만큼 공존과 평화에 이르는 지름길은 없습니다. 용서는 그렇게 본다면 단순히 내가 너를 참아주는 인내의 차원이 아니라 품어주고 알아주는 하느님의 시선입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너른 품을 지녔는지, 오죽하면 오리게네스 교부는 "자비의 하느님은 세상 종말에 악마까지도 구하실 것이다"라고 단언했겠습니까.
성령강림입니다. 새로운 창조입니다. 내년에도 반복될 만큼 후하게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는 하느님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눈을 맑게 하고 귀를 열어야 합니다. 똑같은 말, 똑같은 소리만 조아리는 대중매체 같은, 세상의 소리만 들어서는 이 엉망으로 비틀어진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거짓 평화, 평화를 가장한 침묵과 고요를 위중하게 보고 들으려면, 그리고 진짜 평화를 구하려면 닫힌 문을 열고 나가야합니다. 왜라고 묻고 아니라고 말해야합니다. 문을 열고, 울타리를 넘어, 타이르고 재촉하고, 거들고, 함께 걷고, 격려하고, 용서하고, 품어줘야 합니다.
교회의 시작은 두려움에 떨던 다락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기억해야합니다. 예수는 자신을 살해한 세상을 다시 바로잡기 위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이들과 같은 능력을 희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방식으로, 그의 시선으로 새롭게 세상을 창조하고자 했습니다. 징벌이 아닌 용서로, 폭압이 아닌 평화로, 폭력이 아닌 무력으로, 위풍당당이 아닌 두려움과 떨림으로, 신적 능력이 아닌 인간의 나약함에 오히려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자신 손수가 아니라 이 모든 걸 인간, 곧 우리에게 맡겼습니다. 오늘은 인류가 새롭게 창조된 성령강림입니다.
오늘은 마침 1980년 독재군부의 총탄에 암살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시복된 역사적인 날이기도 합니다. 인간에게 희망을 건 하느님을 가장 하느님 원하는 방식으로 순종했던 그의 예표를 묵상하며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을 마음으로 함께 새겨봅니다.
"저는 자주 죽음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저를 죽이면 저는 엘살바도르 사람들의 가슴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제가 흘린 피는 자유의 씨앗이 되고 희망이 곧 실현되리라는 신호가 될 것입니다. 사제로 죽을지라도 하느님의 교회인 민중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 각자가 모두 우리입니다. (...)때리라는 명령을 들을 때 하느님의 말씀을 생각하십시오! 때리지 말라. (...)하느님의 이름과 비탄의 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억눌린 백성의 이름으로 간청합니다. 호소합니다. 명령합니다. 억압을 중단 하십시오."
영성체 후 묵상 후
로메로 주교의 기도
가끔 뒤로 물러서서 멀리 내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노력으로 세워지지 않는 나라일 뿐 아니라
우리 눈길로 가서 닿을 수도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느님이 하시는 거대한 사업의
지극히 작은 부분을 평생토록 감당할 따름이지요.
우리가 하는 일 어느 것 하나 완전하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손길이 미칠 수 없는 저 너머에 있습니다.
어느 선언문도 말해야 할 내용을 모두 밝히지 못하고
어느 기도문도 우리의 모든 소원을 담지 못합니다.
어느 고백문도 옹근 전체를 싣지 못하고
어느 방문도 돌봐야 할 사람을 모두 돌보지 못합니다.
어느 계획도 교회의 선교를 완수 못하고
어느 목표도 모든 것에 닿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에요.
어느 날 싹틀 씨를 우리는 심습니다.
그것들이 가져다줄 미래의 약속을 생각하며,
우리는 뿌려진 씨들 위에 물을 주지요.
그 위에 벽돌들이 쌓여지고 기둥들이 세워질
내일의 건물에 기초를 놓고,
우리 힘으로는 해낼 수 없는 효과를 내다보며
반죽에 누룩을 섞습니다.
우리는 만능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할 때
거기에서 해방감을 느낄 따름이에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게 합니다.
턱없이 모자라지만, 이것이 시작이요
하느님 은총을 세상에 임하도록 하는 걸음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끝내 결과를 보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그것이 건축가와 목수들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건축가가 아니라 목수들입니다.
메시아가 아니라 사제들이에요.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닌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자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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