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1일
사순 제2주일
마르코 9, 2-10
예수 사후 유구한 세월을 통해 교회가 구축한 전통 중 공동체가 쌓아올린 유산의 찬란함을 가장 외연적으로 잘 드러내는 것은 전례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봄여름가을겨울, 유아기, 청장년, 중년과 노년과 같은 자연의 순환과 인간 생의 주기를 닮은 전례력 말입니다. 사순 부활 연중 대림 성탄과 같은 전례주기도 그렇지만 주일의 독서와 복음을 보고 있노라면 언 듯 보아 서로 상관없어보이다가도 서로 긴밀하고 정교하게 엮여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매우 신통하고 명민한 구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의도된 작품이라기보다는 유구한 세월을 통해 믿는 이들이 함께 터득한 하느님에 대한 공동체의 고백과 같습니다. 또 하나의 진수는 독서와 복음의 배치입니다. 통상 구약이 읽혀지는 제 1독서, 서간 따위의 예수 사후의 믿는 이들의 이야기로 구성된 제 2독서, 그리고 예수의 삶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복음의 배치입니다. 구약이 아직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하느님의 뜻과 다가올 메시아에 대한 예시라면, 복음은 고대한 예수의 삶을 직접 마주함을 의미합니다. 반면 두 번째로 읽혀지는 제2독서는 예수에 대한 해설서, 곧 그의 삶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주석서와 같습니다. 시간 순으로 보나, 논리 전개의 과정으로 보나 당연지사 구약이 읽혀지고 예수의 삶이 등장하고 마지막에 제2독서와 같은 공동체의 고백이 담겨야 할 텐데, 교회 전통은 이를 따르지 않습니다.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보면 그것은 예수가 떠난 직후의 공동체의 예수에 대한 해석에 구애받지 않고 새롭게 예수의 삶이 읽혀지고 오늘의 빛에 비추어 다시 생생해지기를 바라는 교회의 바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해설 붙은 시집은 시시하기 마련이며, 시답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계시는 모든 시대를 위하여 고정된 지식을 하느님이 위로부터 내려주시는데 있지 않다. 계시는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일하심과 그 일하심에 실천적으로 응답하는 신앙인의 체험이다. 음악에서 연주자가 하나의 곡을 연주하는 것은 그 곳을 해석하는 행위이다. 해석은 악보의 자동적 해석이 아니라 연주자의 창조적 행위이다. 악보가 없었다면 그 음악의 연주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창조적 해석인 연주가 없으면 악보는 음악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서공석/ 신앙언어 중)
오늘의 독서와 복음의 구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만을 단독으로 본다면 영광중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예수의 모습과 아직 밝혀지지 않은 예수 수난의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수난 이전에 예수의 정체가 밝혀지는 영광과 부활의 모습이 배치되며 예수가 감당할 고난과 죽음의 당위를 설명합니다. 의례, 십자가 없이 영광 없고, 죽음 없이 부활이 없다, 영광의 산위가 아니라 십자가의 산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는 등의 통상적 해석들을 듣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오늘 앞서 읽힌 독서들을 다시 읽어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독서와 복음을 관통하는 단어는 의외로 피비린내 나는 '죽음', 자기 부정입니다.
죽음은 종교적 의미 이전에 인간적으로 생의 마지막 모습이고 사회적으로는 죄와 형벌에 관한 것입니다. 죽음은 종교적으로 제물이 흘리는 신성한 피지만, 실상 그것은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전장에서도 보게 되는 역한 피비린내요, 누군가의 목숨에 관한 것이라면 살육이라는 인간의 잔혹함입니다. 하나도 거룩하지도 또 신성하지도 않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앞에 숨이 막혀버리는 부조리의 최고조, 이해와 수긍 저 너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과 불가해입니다. 늦게 얻은 아들을 봉헌하라는 아브라함의 신은 아무리 치장하고 변호해도 기괴하기 이를 데 없는 고약한 신이며, 자신을 봉헌해 누군가의 목숨을 살리는 제2독서 바오로가 가리키는 죽음은 일면 숭고하고 거룩해 보이지만 정작 "너라면 어떻겠느냐"는 실존적 질문에는 순순히 그러마하고 답할 수 없는 극한의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와 이야기를 나눈 모세와 엘리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모세는 고난 받는 동포들을 이끈 지도자 이전에 이집트의 맏배들을 모조리 치고, 홍해를 건너는 무리를 쫓아오던 수만의 병거를 수몰시킨 죽음의 장본인입니다. 엘리야는 어떻습니까. 누구의 신이 참 하느님인지를 두고 바알의 제사장들과 대결한 후 450명에 이르는 제사장들을 키손 냇가로 끌고 가 직접 살육한 이입니다(1열왕18,40). 예수가 짊어진 죽음은 어떻습니까. 평온한 죽음이 아니라 자신을 낳아준 어미가 바라보는 가운데 죽음을 향해 걸어야했던 불효와 잔혹의 죽음입니다. 하나같이 높고 엄숙함을 논하기 힘든 핏빛 죽음입니다.
하지만 핏빛 죽음에서만 예루살렘 도성을 앞에 두고 흘린 예수의 눈물과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십자가 상 절망의 탄식의 깊이가 온전히 드러납니다. 드높고 고상한, 숭고하고 엄숙함 저 너머의 극한의 절망만이 참 하느님이자 참 인간인 하느님이 흘린 눈물을 이해하게합니다. 적당하게 내어줌이 아니라,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고상한 말이 아니라 정말로 다 털리고, 다 버리고, 다 빼앗긴 가난의 직면이 예수의 죽음을 온전히 이해하게 합니다. 늦게 얻은 외동아들을 봉헌하라는 신의 기괴한 주문 앞에 하얗게 지샜을 아브라함의 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말 나를 살리기 위해 자기를 버린 이의 자기희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짜 죽음이 무엇인지를 먼저 실감해야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마전장이 보다 더 하얗고 황홀하게 변모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곤, 이내 산을 내려와 죽음을 향해 가야했던 예수가 느꼈을 공포와 절망을 먼저 헤아려야합니다. 가짜 죽음이 아닌 진짜 죽음, 모든 것이 끝나고 모든 것이 절단 난, 모든 박동이 멈춘 일대 정적, 죽음 말입니다.
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직면해야하는 매우 인간적인 단어이지만 동시에 매우 종교적인 언어입니다. 성서에서의 죽음은 징벌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봉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형편에 따라 가축을 번제물로 바쳤고, 예언자들은 신의 의지를 위해 자신의 의지와 다른 것들을 받아들여야했습니다. 전자가 '여백 있는 봉헌'이라면 후자는 '남김 없는 봉헌'입니다. 전자는 후사를 고대하게 하지만 후자는 맨 마지막 것입니다. 전자가 일부의 상실이라면 후자는 완전히 빼앗김, 온전할 상실, 자기 봉헌, 자기 부정입니다. 하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이 자기 봉헌입니다. 그 누가 모두 잘려나가고 빼앗기고 잃어버릴 죽음을 사랑한단 말입니까. 그러마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인간의 자기보전이라는 본능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봉헌은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가난해져야하기 때문입니다. '척'이 아니라 '진짜' 가난해지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는 가난의 마지막 모습까지도 말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는 소중한 목숨을 바치라는 요구를 이내 거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라면 다른 하나는 자신의 소중한 아들을 내어주는 모습입니다. 역설입니다. 환하게 빛나며 영광중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들에게 선사하고 그 빛남을 기억하라 이르며 다시 저 절망의 산 아래로 떠미는 역설입니다. 우리는 이 하느님의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저 죽음이 무엇인지 알아봐야합니다. 아들을 바치라는 기괴한 요구 앞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모리야 땅이 깊어질수록 더욱 짙어졌을 아브라함의 죽음 같은 절망을 먼저 겸손하게 들어야합니다.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시 산길을 내려와야 했던 아들의 절망과 공포의 뒷모습을 곰곰이 바라봐야합니다. 그때만이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포기했고 무엇을 내 놓았는지를 이해하게 되며, 이 자기 봉헌과 헌신이 어찌 나를 구원했는지 이해하게합니다. 하느님의 역설은 그렇게 진짜 죽음 한 가운데를 통과할 때만이 생명으로 다시 살고 진짜 가난의 절망 속에서 부유함으로 피어납니다. 그때 비로소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서도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며, 나와 한 치의 연관 없는 이의 죽음이 한낱 무용담이 아니라 진짜 나를 살리고 나를 걷게 하는 구원의 소식일 수 있습니다.
이제 곧 시복이 이루어질 남미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을 떠올려봅니다. 동포들의 억울한 죽음을 항의하러 찾아간 그에게 어제까지 자신에게 칭송과 환대를 아끼지 않던 군부가 돌려준 싸늘한 눈빛. 그 날, 그의 밤을 떠올려봅니다. 어제까지 환대받던 이였습니다. 어제까지 어느 자리를 가든 높은 자리가 허락된 이가 오늘은 문전에서 박대당했습니다. 그 밤, 그는 경계인입니다. 자신을 재촉했던 가난한 사람들의 울음을 마냥 따라갈 것인지, 아니면 이쯤에서 점잖고 고상한 말로 적당히 타이르고 뒤로 물러설 것인지. 그는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앞으로 한 발짝 더 가면 가난한 이들을 편들다가 자신마저도 가난한 사람이 될지 모른다는 공포감과, 신학서적에나 나올 고고한 말로 에둘러 말하며 이 자리를 지켜야하겠다는 자기보전의 욕구 사이, 한끝 칼날 위에 서있습니다. 결국 그는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자신을 봉헌합니다. 미사를 봉헌하다 성당에 난입한 군인이 쏜 총에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둡니다. 그의 봉헌의 의미 역시 이 뜬눈으로 지새운 밤의 절망과 성체 앞에서 고뇌한 어둠의 시간을 이해할때만이 온전해집니다. 그의 죽음이 진짜 생명을 얻는 봉헌인 이유는 다름 아닌 다 빼앗기고 잃어버리는 죽음 같은 가난이 무엇인지를 겸손 되게 직시했기 때문입니다. 밤이 빛의 선생이며 겨울이 봄의 임박을 알리는 전언인 이유입니다.
때문에 아브라함의 절망의 깊이를 이해해야만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내어놓은 죽음이라는 자기 봉헌을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의 절망의 깊이를 이해해야만 하느님의 절망을 이해할 수 있으며, 세상의 눈물을 이해해야만 하느님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든든해집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를 편드는 게 누구이고 우리를 사랑하는 게 누구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세상의 모든 시기와 질투, 중상과 모략, 죽음의 위협 앞에 의연할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나와 상관없는 하느님이 나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산 아래 마을로 진심으로 내려올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든든해져 고백합니다.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뿐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는데 누가 우리를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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