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다 (강론)

연중 제 24주일

바깥 주인장 2010. 1. 31. 21:20

연중 제 24주일 2009 9 13

 

1789년 7월 14일 프랑스가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정치범들을 수용하던 바스티유 감옥도 습격을 당하고 풀려난 사람들의 입에서는 혁명가가 터져나오고 손에는 혁명의 깃발이 나부낍니다. 모두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고 이제껏 민중을 무지 몽매하게 내버려두고 기만한 왕과 부유한 귀족들 그리고 성직자들을 권력의 권좌에서 끌어내립니다. 루이 16세와 저 유명한 마리아 앙트와네트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혁명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혁명의 정신을 전 유럽에 알리고 부당한 권력으로부터 인간을 계몽하고 자유 평등 박애가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 승승장구하던 프랑스 혁명군의 선두에 그 유명한 나폴레옹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가는 곳 마다 절대왕권이 무너지고 자유와 평등 박애라는 자유의 여신이 깃발이 되어 펄럭입니다. 사람들은 외칩니다. 영웅이라고... 영웅이 우리를 해방한다고.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있는 베토벤 역시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에 매료되어 그에게 헌정하는 "영웅"이라는 교향곡을 작곡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입니다. 억압에서 그리고 폭정에서 자유를 가져다 줄줄 알았던 그 전쟁영웅 나폴레옹은 자신의 야욕을 조금씩 내보이며 급기야 황제에 등극하게 됩니다. 그 모습을 목도한 베토벤은 자신이 나폴레옹을 생각하며 지은 영웅교향곡의 악보를 다시 꺼내들고 "그 역시 졸부였구만"이라고 한탄합니다. 새로운 세상의 질서를 가져다줄 것 같았던 나폴레옹이 정작 자신도 권력을 탐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았을때 그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자유와 평등, 박애라는 인류 보편적 진리를 위해 한몸 바치겠다던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떠나가고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며 종국에는 황제라는 직위를 박탈당하고 다시 유배형을 살게됩니다. 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구할 거라고 믿었지만 그의 야욕에 배신감을 맛보고 분노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지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은 연신 죽은 엘리야가 돌아오거나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던 세자 요한이 살아돌아 온 것처럼 사람들이 열광한다고 전합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 남아있던 메시아 전설, 즉 세상을 구할 예언자 곧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다라는 믿음을 예수님에게 투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남들이 하는 이야기 말고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듣고 전하면 그만인 정보가 아니라 내가 바라는 기대와 내가 희망하는 세상의 믿음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입술로의 정보가 아니라 가슴으로 몸으로 고백하는 내 진짜 생각을 듣고자 하십니다. 남들이 답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졸졸이 외워서 되내이는 것이 아니라 힘겹지만 끙끙대며 뱉어내는 나의 고백을 듣고자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계십니까? 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이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만류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외치며 호통치기까지 합니다. 예수의 호통은 사람들이 당신을 기다리던 영광과 권력의 세상의 새로운 질서를 가져올 메시아가 아님을 거듭 강조하는 행위입니다. 호통을 칩니다. 내가 바라는 세상, 내가 생각하는 믿음, 내가 믿는 인간의 도리는 너희가 그냥 입술로 전하고 기대하고 바라는 그 영광의 모습이 아니라고. 예수는 그 새로운 세상의 질서는 권력이 아닌 고난이고 영광이 아닌 비난과 죽음이며 화려함이 아닌 전라의 몸으로 십자가상에 놓여지는 부끄러움이며 내가 내놓은 만큼 받는 다시 돌려받는 보상이 아닌 내놓은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내어놓는 봉헌입니다.

제자들은 실망합니다. 자신들이 골은 배를 움켜쥐며 따라다니던 영광의 메시아, 전설속의 메시아가 혁명의 깃발을 내걸고 군대를 모으고 압제자 로마를 쳐부수며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할 새로운 왕이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하고 분노합니다.

우리들 인간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자주 다른 상대와 외부의 것에 투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면서도 내가 만든 틀과 내가 바라는 모양으로 그를 만들고는 그 만들어진 그가 바로 그라고 믿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는 실망합니다. 또 분노합니다. 그리고 떠나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미안하지만 난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하며 우리의 기대에 초를 치십니다.

아침에 티브를 틀면 참 많은 강사들이 좋은 말을 잘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처세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습관, 성공으로 가는 법, 나도 20억 부자가 될수 있다, 재테크의 기술등, 우리가 바라는 배부르로 등 따슨 삶을 위한 여러 가지 처세술에 우리는 열광합니다. 바라는 만큼 얻을 수 있고 성공하는 방법을 알면 우리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기복에, 심지어는 우리의 신앙을 성공을 위한 방법중에 하나로 여기는 이기주의를 보고 열광합니다. 가끔 내가 열심히 믿음을 지키면 나의 가족에 우환이 없고 나도 성공하고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잘못된 신앙을 심어주기도 합니다.

착각입니다. 예수님은 그 착각에 오늘 복음처럼 분명 호통치실 겁니다. 당신은 예수님 당대에 사람들이 열광하던 그 영광의 예수가 아닌 고난당하고 매질당하고 그리고 발가벗겨져 십자가에서 죽어갈 운명임을 이야기 합니다. 전쟁에 승승장구하여 자신의 제자들을 제상과 신하로 삼는 것이아니라 길을 지나다 먼 발치에서 쭈빗거리던 죄인 자캐오를 부르며 그 죄인의 집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나누며 함께 잠을 청하는 측은지심을 가진 진짜 인간입니다. 죄많은 여인을 정의와 법대로 돌로 쳐 죽이려는 사람에 썫여서 정의와 법이라는 이름으로 돌팔매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비난하고 힐난하는 사람들 사이에 조용히 몸을 숙여 땅바닥에 이 세상의 온갖 죄를 적어내리는 용서의 인간입니다.

매일미사에 참석하고 매일 기도를 드리며 경건하게 산다고 자부하는 우리들에게 매일미사를 참석하고 기도를 드리며 경건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고통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마음아파하며 그 고통받는 수많은 이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를 드리며 그리고 무언가 행동하는 것이 진짜 경건한 삶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의 큰아들처럼 내가 바치는 봉헌금과 열심한 생활에 위안감을 느끼는 기복이 아닌 세상의 온갖오물을 뒤집어쓰고 비난 받고 천대받지만 그래도 진정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겠다는 용기를 가진 탕자를 우리에게 바라십니다. 믿는대로 이루어지리라는 말에서 믿는것을 단지 신심활동과 미사봉헌 그리고 교회에 바치는 교무금과 봉헌금으로 착각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미안하지만 난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제자들은 세상이 바라보는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이 바라보는 세상을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오른쪽 이라고 외치지만 예수는 그 군중 한가운데를 지나서 의연하게 왼쪽으로 가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잘먹고 잘 사는 것을 이야기하지만 예수는 배고프지만 배부르고 가난하지만 행복하며 혼자가 아닌 함께를 이야기하는 진정한 진리, 인간의 존엄, 인간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을 내 식대로 믿고 제단하고 위안했습니다.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내가 하나를 내어 드리면 하느님은 나에게 그에 따른 보상을 할 것이라고 안도했습니다.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말해주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