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라마의 통곡 속에 ‘교회’로 세워진다
팔레스타인 전쟁과 교회의 자리
숫자의 배면
약 10,400. 10월 7일 개전 이후 한 달 사이에 목숨을 잃은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의 숫자다. 2000년부터 2018년까지 이스라엘과의 분쟁에서 희생된 팔레스타인은 대략 10,000명. 지금 가자지구의 사람들이 견디고 있는 폭력과 공포의 밀도를 말해준다. 그것도 백 단위 밑으로는 집계조차 되지 않는 ‘헤아릴 수 없는’ 죽음이다. ‘대략’이라는 무심한 말은 실은 이토록 끔찍한 것이다. 모든 재난과 전쟁이 그렇듯 숫자에는 언제나 피와 빼앗긴 삶이 엉겨 붙어 있다. 비극은 이 참혹함을 담은 숫자가 언제나 고요하고 단정하다는 것이고 여간해선 이 배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몽당연필에 빚을 진 인류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돌아온 유대계 이탈리아인 프리모 레비는 수용소에서 전쟁 전의 기억을 틈틈이 글로 남겼다. 첫 입맞춤, 노랗게 출렁이던 해바라기밭, 복작였던 축제의 밤. 수용소의 참상이 아닌 ‘좋았던 한때’를 애써 기록한 까닭에 대해 그는 생환 후 출간한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작품에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인류는 폭력으로 헤지고 일그러진 육체가 손에 쥐었을 저 몽당연필에 빚을 진 셈이다. 비록 ‘레비’라는 고유명사는 찢기고 지워졌어도 인간이라는 보통명사는 이로써 온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 표명을 넘어 가자지구 보건당국의 사상자 숫자가 부풀려졌다고 강변하는 미국의 노골적 편들기까지, 팔레스타인에서 중동 국가들에서 통용되던 ‘비례원칙’ 따위는 잊힌 지 오래다. 정당방위로 포장된 멸절일 뿐이다. 국제여론을 의식해 교전 중단을 중재하면서도 ‘휴전’이 아닌 애써 ‘일시 중단’이라고 강조하는 ‘초강대국’의 양심과 위상은 이미 깃털보다 가볍다.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를 비롯한 이스라엘 교회 지도자들의 전쟁 중단 호소를 “비도덕적인 언어적 모호함”으로 비난한 이스라엘은 연필로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꾹꾹 눌러쓰던 저 무너진 육체보다 더 형편 없이 무너졌다.
다시 또 인류는 포화 속에서도 인간이라는 보통명사를 온몸으로 지켜낼 무수한 ‘레비’에 빚을 져야만 할 것이다. 숫자의 배면에 들러붙은 것은 따라서 피와 살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이름, 인간이기도 한 셈이다.
로마와 팔레스타인
‘창조주를 살해한 민족’(deicidium)이라는 낙인을 걷어내고 교회가 유대인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길 원했던 것은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첫 회기가 끝나갈 무렵에 이르러서다. 1959년 이미 요한 23세가 기존의 전례서에서 유대인을 향한 혐오적 표현을 삭제하게 하는 등 이전과 비교해 교회의 유대인을 향한 시선은 사뭇 달라져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책임과 계시의 거부로 유대인은 구약의 모든 권리를 상실했고 교회야말로 이들을 대체할 새로운 백성이라는 기존의 신학적 사고는 여전했다. 교부들이 유대인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할 필요성에 일찌감치 공감했어도 이를 다룬 문헌(“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Nostrae aetae)이 공의회 폐막 직전(1965년 10월 28일)에 이르러서야 채택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세의 관습적 사고에 더해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래 갈수록 격화하던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의 갈등도 있었다. 이슬람권의 교부들은 공의회의 선언을 신학적으론 동의해도 심정적으론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미 두 차례의 중동전쟁(1948, 1958년)으로 참상을 익히 겪은 아랍 동포들에게 공의회의 선언은 충분히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로 비칠 수 있었다. 이슬람 사회에서 이미 ‘소수’로 견뎌 왔던 처지가 더 가혹해질까 두려웠다. 선언은 수많은 토론과 정교한 작업을 통해 ‘정치적인’ 균형을 찾은 한참 후에야 발표될 수 있었다.
라마에서 들려오는 통곡
프란치스코 교황의 평화를 위한 절박한 호소처럼 팔레스타인을 향한 교회의 시선이 늘 한결같았던 것은 아니었다. 1917년 12월 9일 로마 시내 성당이 일제히 종을 울렸다. 베네딕토 15세의 만류에도 오스만제국의 종말과 영국 군대의 예루살렘 점령을 환호한 것이다. 내심 교회는 18세기부터 정교회가 누려오던 성지에 대한 특권을 이참에 가톨릭이 되찾아 올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유대인을 위한 나라를 지지한다는 영국의 벨푸어 선언(1917년)이 이어지자 기대는 이내 불안으로 바뀌었다. 그간 어렵게 유지해 오던 한 줌의 종교 자유와 성지에 대한 권리를 신생 이스라엘 정부가 인정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1922년 영국의 위임통치 선언으로 그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었지만 모호한 상황 속에 이어지던 평화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혀 다른 국면이 펼쳐졌다. 영국군의 철수가 결정된 후 발표된 국제연합의 ‘분할안’(1947년 11월,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 각각의 독립 국가 건설) 앞에 비오 12세는 말을 아꼈다. 동의도 반대도 아닌 침묵이었다. 이슬람교가 대다수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편입될 교회들도 걱정이었지만 예루살렘 성지에 대한 권리도 위태롭긴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비오 12세가 이 시기 세 번에 걸쳐 내놓은 회칙들은 요동치던 정세에 따른 교회의 심경 변화를 짐작게 한다.
이스라엘의 기습적 건국 선언(1948년 5월) 전에 발표된 첫 번째 회칙이 팔레스타인의 평화에 대한 관례적 호소였다면 선언 이후 잇따라 발표된 나머지 두 개(1948년 10월, 1949년 4월)는 매우 분명하고 구체적이었다. 예루살렘의 ‘국제도시화’와 팔레스타인 전역에 흩어져 있던 성지에 대한 가톨릭의 전통적 권리와 활동에 대한 국제법적 보장이었다. 1949년 아랍 연합군의 패전(1차 중동전쟁)으로 국제연합이 설정한 크기보다 더 좁은 땅으로 내몰려야 했던 팔레스타인인들이 연일 극단적 시온주의자들에게 매 맞고 쫓겨나고 학살되었지만, 교회의 시선은 ‘거룩한 장소’를 맴돌 뿐이었다. 일찍이 수도원과 교회의 문을 열어 수많은 유대인을 인종학살의 광기로부터 구해냈던 교회였지만 말이다. ‘라마에서 들려오는’ 멈추지 않는 곡소리에도 교회는 좀처럼 성지를 벗어날 줄 몰랐다.
고통을 마주하고서야
공의회를 기점으로 유대민족과의 관계가 확연히 달라졌지만, 이스라엘과의 수교 체결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수에즈 운하에 대한 권리를 둘러싸고 촉발된 전쟁(1958년 2차 중동전쟁)에서도 이권을 지키려는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과거 식민 경영 국가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압도적으로 승리하며 팔레스타인의 맹주로 자리 잡아가던 이스라엘과의 수교는 신중해야만 했다. 그것으로 염원하던 성지에 대한 권리는 보장받을 수 있었을지언정 아랍 국가들 속에 소수로 명맥을 이어오던 교회들의 안전마저 지켜낼 수는 없었다. 더욱이 크고 작은 분쟁 속에 갈수록 가혹해지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일이었다. 이스라엘 정부와의 외교적 협상을 계속 유지하면서도 최종 단계에 이르러 교황청이 조약문 작성을 의도적으로 번번이 결렬시켰던 이유다.
선임자의 노선을 계승하면서도 바오로 6세는 좀 더 유연하고 넓은 시야로 팔레스타인을 품고자 했다. 근대 이래 교황으론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했고 그리스도인의 권리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민족의 권리도 보장받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안전과 평화를 보장할 어엿한 국가를 염원했던 자신들의 과거를 헤아려 이스라엘도 이웃 민족을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국제사회의 ‘두 국가 해법’과 같은 맥락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한 발짝 더 나아가 (1984년 회칙 Redemptoris anno) 그리스도교 성지만이 아니라 다른 세 종교(그리스도교, 이슬람, 유대교)의 장소들도 국제법적으로 보장되어야 함을 분명히 했다. 더뎠지만 ‘성지’를 벗어난 교회는 비로소 ‘로마’가 아닌 ‘팔레스타인’의 교회로 천천히 세워졌다.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서
1993년 국제사회의 중재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 모처럼 조성된 평화 분위기 속에 교황청도 마침내 이스라엘과 정식 수교를 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있다면 성지에 대한 좀 더 안정적인 유지일뿐, 염원하던 팔레스타인의 평화는 오히려 악화일로다.
그럼에도 ‘거룩한 장소’를 벗어나 가자지구 깊숙이로 또다시 교회가 달려가야 하는 까닭은 그곳에서만이 비로소 ‘교회’로 선명히 세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참화 속 레비의 연필 자루 위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그러나 또렷이 빛났던 인류라는 보통명사처럼 교회는 저 통곡의 한가운데서 만이 복음과 자신을 좀 더 잘 알아보고 지켜낼 수 있다. 스승의 최후가 새겨진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래아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만나자 했던 스승의 약속처럼, 익숙한 고향을 뒤로하고 모리야 땅 깊숙이 들어가라 했던 하느님의 재촉처럼, 교회는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교회’로 체험하고 만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시작해 팔레스타인 전쟁으로 연재를 끝마쳐야 하는 현실이 슬프다. 교회가 걸어갈 여정이 한참이다. 그럼에도 “여기에 있고, 다시 올 것이고, 새롭게 꽃피우고자” 하는(복음의 기쁨 278항) 하느님 나라에 신뢰를 두자. 그간 함께 걸어준 독자들의 인내와 아량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사람들 사이에서 ‘교회’로 다시 만나길 함께 희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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