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일기(칼럼)

시간의 속도(정의평화 2020년 2월호)

바깥 주인장 2020. 2. 15. 00:06

  시간의 속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도좌 권고 “복음의 기쁨”을 처음 만났던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매우 신중해 형식적이고 관념적인 느낌마저 주었던 역대 교황의 글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밖으로 나아가는 교회, 상처받고 더러워지길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 교황의 꿈은 놀랍고도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완전한 사회’를 포기하고 ‘하느님의 순례하는 백성’으로 자신을 고백했던 ‘교회’가 교회 최고지도자의 입까지 도달하는데 반세기가 소요된 셈입니다. 두 번째 문헌의 울림도 처음 것 못지않았습니다. 회칙, “찬미 받으소서.” 환경을 비롯한 오늘의 인류가 처한 위기를 총체적으로 다루는 문헌은 자신의 영감을 교회 전통만이 아니라 교회 밖 지성으로부터도 길어올 만큼 담대하고 진솔합니다. 더러는 이를 ‘환경회칙’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문헌의 정신적 폭과 깊이를 온전히 담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한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후위기와 같은 실제적 문제에서 출발하는 문헌은 신자유주의 체제 하의 세계를 실증적으로 비판하며 환경위기 등이 자연보호 따위의 현상적 처방으로 치유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관료제와 분업화, 기술만능주의 등 인류가 성취한 ‘근대성’의 핵심에 의문을 제기하며 환경문제 등 현대의 위기는 그릇된 인간중심주의, 바로 인간학적 위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전통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된 인류가 이를 올바로 사용할 정신력과 도덕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진단은 어찌 들으면 모든 문명적 성취에 대한 근본적 회의 같아 추상적이고 ‘터무니없는’ 소리 같습니다. 하지만 ‘근원적’ 진단임은 분명합니다. ‘근원적’, 그래서 그것은 느리고, 눈에 띄지 않으며, 긴 호흡을 요하는 장기간의 노력이기도 합니다.

 

최근 10년 동안 인류는 전 세계적 규모의 전염병을 몇 차례나 경험해야했습니다. 생각해볼 것은 이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역시 역설적이게도 지난 세기와 비교해 물질적으로 엄청나게 풍요로워진 중국대륙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인류의 꿈이었던 풍요가 밝은 미래만을 담보하진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위협은 이 풍요 속에서 더 치명적으로 자라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닥쳐옵니다. 재앙은 비단 인간의 면역력을 압도하는 바이러스의 무서운 변이 속도만이 아닐 것입니다. 극도의 공포심이 만들어낸 특정 인종과 국가에 대한 혐오와 배제, 증오는 물질의 성장 속도를 쫓아가지 못하는 현대 사회의 정신적 빈곤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교황의 현대 사회에 대한 진단을 결코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게 하는 대목입니다.

 

인천교구 신부들이 25년간 운영해온 장학회도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제연대 평신도인재양성사업.” 어쩌다 이 장학회를 도맡았지만 장학회에 대한 개인적 열정은 아무래도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 뜨뜻미지근함은 사제들이 십시일반 모은 기금이라면 어떻게든 빈민사목과 같은 실제적인, ‘교회다운’ 무언가에 사용되어야하지 않을까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겠습니다. 극지방 해양탐사부터 조리학까지,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장학회 출신 인재들을 만나 오면서 그러나 차츰 입장이 변해왔습니다. 뜨뜻미지근함은 사실 가시적이고 즉각적인 성과에 익숙한, 교황이 비판하던 ‘근대성’으로부터 저 역시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장학회 명단을 바라보며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지붕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을 밑돌을 놓는 일, 도구가 아니라 정신을 키우는 일, 물로 세례를 주는 외연의 확장이 아니라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계절 넘어 들판을 상상할 줄 아는 농부의 일... 25년 전 교회의 인재만이 아니라 교회 정신으로 세상을 복음화 시킬 일꾼을 키우고자 뜻을 모았던 선배들의 통찰, 현 인류가 마주한 위기를 인간학적 위기로 진단한 교황의 처방, 우리는 우리가 헌신하는 일의 결말을 끝내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엘살바도르 로메로 대주교의 고백, 이들 모두의 시간은 같은 성질의 것인 셈입니다. 더디지만, ‘근원적인’, 신뢰를 가져야만 지속되는 시간입니다. 조바심이 아니라 먼저 묵직하게 내려앉고 견뎌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기에 있고, 다시 올 것이고, 새로 꽃피우고자하는” (복음의 기쁨 278)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날은 쉽게 오지 않는다. 그날은 깨지고 박살 나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다음에 온다. 그날은 참고 기다리면서 엉덩이가 짓물러진 다음에 온다. 그날은 그날을 고대하는 마음과 마음들이 뒤섞이고 걸러지고 나눠지고 침전되고 정리된 이후에 온다.” -안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