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다 (강론)

초막을 허물어라(2020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바깥 주인장 2020. 2. 1. 18:46


 

강의를 해준 인연으로 수녀님들의 첫 서원 미사 주례를 부탁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서원자들이 선택한 복음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마태오 17, 1-9)였습니다. 강론을 위해 복음을 묵상하던 중 이 초년병 같은 수도자들이 새삼 대견하게 느껴졌습니다. 베드로가 지어 바치겠다던 초막은 실상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의 땅을 뒤로하고 떠났던 아브라함, 모세와 백성들의 광야 40년, 변변한 거처하나 없이 떠돌던 예언자들, 모두 순례자라는 숙명을 짊어진 이들이었습니다. 초막은 그러니까 그들 삶의 고단함을 의미하는 동시에 약속에 기대어 ‘미지의 땅’으로 나아가던 모든 여행자들의 운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초막은 돌로 지은 집이 아니라 쉽게 짓고 허물 수 있는 여행자들의 임시거처입니다. 그것마저 마다하고 스승은 제자들을 재촉해 다시 산길을 내려왔던 것입니다. 스승 역시 저 옛날의 순례자들처럼 하느님 약속에 기대어 ‘알 수 없는 내일’에 자신을 내어맡긴 것입니다. 산길을 내려오던 스승, 실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하느님의 뒷모습입니다. 이제 막 봉헌생활의 문턱에 선 서원자들, 적어도 이런 복음을 선택한 이들이라면 수도 없이 짓고 허물기를 반복해야할 이 여정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새삼 그들이 대견했던 이유입니다.

 

봉헌된 아기 예수와 함께 오늘 복음의 또 다른 주인공은 아기의 부모들이겠습니다. “반대의 표징”이 될 것이라는 시메온의 말 앞에 여전히 소녀 같은 어머니, 마리아의 표정은 어떠했을지 궁금합니다. ‘놀랐다’는 루카의 묘사는 가브리엘 천사의 탄생 예고(루카 1, 26이하)를 듣던 마리아의 놀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놀람들은 그러나 경이로움과는 거리가 있는, 오히려 막무가내로 밀어닥치는 폭풍우 앞에서 느낄법한 당혹스러움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작은 여인의 위대함은 두려운 미지의 운명을 “곰곰이” 숙고했다는 것입니다. 저 옛날 하느님의 약속에 신뢰를 품고 집과 땅을 버려두고 길을 나섰던 첫 여행자들처럼, 그도 ‘초막’을 허물고 떠날 줄 알았던 것입니다. 물론 루카는 탄생 예고와는 달리 시메온의 쾌청하지만은 않은 예언 앞에 부모들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자세히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 기록되지 않은 문장 속에 실로 부모들의 진짜 봉헌이 숨어있겠습니다. 봉헌된 것은 아기이지만 부모들은 세상의 모든 어버이들처럼 분명 아기가 짊어질 운명에 자신들의 운명마저 얹고 포개어 함께 봉헌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피앗(fiat)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 2독서의 히브리서는 모든 점에서 인간과 같아진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위로하기 위하여 고난을 짊어진 분이 예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영원이 유한을 위로하기 위해 스스로 불완전해진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낮춤은 인간을 위해 자신을 내어준 하느님의 ‘봉헌’인 동시에 인간, 이 보잘 것 없는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한 하느님 ‘일치’의 의지이기도 합니다. 봉헌은 안에서 밖으로 내어놓는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실상 나의 것이 아닌 것을 제 것으로 삼는, 밖에 있던 것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수용에 가까운 것입니다. 미지의 내일에 자신을 밀어 넣는 것은 이 알 수 없는 길을 마련한 하느님의 계획을 나의 계획으로 삼는, 그 길에 나의 운명을 얹고 포개 그분과 일치하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흔히들 하느님을 향한 봉헌을 뭔가 그럴듯한 나의 것을 희생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이렇게 따진다면 사실 참된 봉헌은 그분의 놀라운 계획을 도리어 내가 선물 받는 것이겠습니다.

 

며칠 후면 ‘거룩한 변모’를 복음으로 선택했던 수도자들이 드디어 종신 서원을 합니다. 초막을 얼마나 짓고 부셨을지, 여정을 시작할 즈음 ‘나의 계획’으로 가득했던 가방은 얼마나 단출해졌을지 궁금합니다. 그분이 마련한 놀라운 여정에 언제든 홀연히 떠날 가난한 순례자로 서있길 기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