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6일 연중 제24주일
마르코 8, 27-35
예수는 제자들에게 두 개의 질문을 던집니다.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둘 모두 예수의 정체에 대한 물음입니다. 복음에서는 이 질문이 모두 한자리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그려지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서란 것이 스승을 회고하며 작성한 것이기에 오늘 베드로의 대답은 스승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모두 체험한 공동체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 부분, 예수살렘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처럼 말하는 내용 역시도 예언이 아니라 실은 지나간 사건의 요약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예루살렘에서의 사건을 통해 공동체는 각기 기대하는 스승의 이미지를 버리고 비로소 참된 스승의 모습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비로소 예언자 중 하나가 아니라 ‘스승’이요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을 다만 베드로의 입을 빌려 하는 것뿐입니다.
다시 두 개의 질문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정보나 지식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는 그와 내가 맺는 관계에 대한 질문입니다. 첫 번째는 정보이기에 틀려도 그만, 책임이 없지만 두 번째는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만이 찾을 수 있는 답이기에 인격이 달린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진실에 가까운 것은 후자에 해당합니다. 다수의 의견, 곧 민주주의가 진리에 꼭 부합하지 않는 것처럼 다수의 나에 대한 생각이 항상 진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게 체험된 그, 나와의 관계 안에서의 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란 베드로의 입을 빌린 당시 신앙공동체의 고백은 그를 겪은 시간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체험의 공동체만이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따진다면 예수가 “명백히” 말한 수난과 죽음, 부활에 대한 예고는 공동체가 겪었던 극적이고 밀도 높은 역사인 것입니다.
강아지는 인간과 소통하기 위하여 짖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짖는 것은 인간과 소통하고자한 진화의 결과물이지만 사실 개와 인간은 꼭 그런 것으로 소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는 인간 목소리의 톤과 억양, 두께, 떨림 등을 통해서 상대가 누구인지, 어떤 기분인지 단박에 파악한다고 합니다. 말을 못 알아들어도 단박에 그 상대의 실체, 진실에 가 닿는 것입니다. 반면에 인간의 언어는 어떻습니까. 기만의 도구이기도 합니다. 정보는 대개 말로 전달됩니다. 장황하고 화려할수록 진실이 아니라 기만과 왜곡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이렇게 따지면 인간의 언어는 참으로 허약하고 부질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느님을 이해하는데 그 말이 얼마나 쓸모 있을지 의구심이 듭니다. 결국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에 대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남이 아니라 내가 겪어낸 그 사람, 체험 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복음 후반은 더 엄중한 이야기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를 고백하는 당시 공동체는 십자가 사건을 겪고 나서 그를 뒤돌아보며 그가 알려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같은 사건을 겪고 나서 터져 나온 고백입니다. 지도자를 잃은 공동체가 얼마나 옹색했을지 쉽게 짐작이 갑니다. 그러나 찬찬히 뒤돌아봤을 것입니다. 비참한 말로만이 아니라 그 이후 부활의 아침도 생각했을 것이고, 함께 걸었던 길, 만났던 사람들, 그가 하던 말, 사건들을 되새기며 비로소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가 내게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 말입니다. 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 보존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지우는 것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이 얼마나 숭고하고 거룩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따진다면 결국 믿음, 신앙이란 것은 그가 걸었던 길을 걸어본 사람만이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종결은 그러니까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예수와 같은 시간과 공간을 누릴 수 없는 이 시대 무수한 이들이 그래도 그를 주님으로, 스승으로,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는 까닭은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나의 십자가를 지는, 무명과 억울함, 희생과 헌신의 그 길 끝에 다라라야 만나는 그분을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2독서 야고보 사도가 힘주어 말하는 실천 없는 신앙은 단순히 착하고 도덕적으로 살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얻는 비전인 것입니다. 그가 걸은 길은 나도 걸을 때만이 우린 그분을 비로소 ‘고백’할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고백하는 사람이 되려거든 먼저 그의 길을 걸어야겠습니다. 그래도 부족하다면 더 걸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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