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1일 주님부활대축일
요한 20,1-9
오늘 우리가 낭독한 복음은 부활 아침의 것이라기보다는 엄밀한 의미에서 장례 후에 관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소생한 몸이나 그걸 보고 놀라는 제자들을 배치하는 편이 더 어울렸을 텐데 복음이 전하는 부활 날 아침은 묘사만 봐서는 그저 시신마저 잃어버린 황망한 아침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당황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들에게 부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도록 합니다. 우리가 믿는 부활은 무엇인가. 죽은 몸의 소생인가? 어떤 초자연적 실체의 출현인가? 영원히 죽지 않을 불사불멸의 육신인가? 모든 복음이 부활에 대해 거의 비슷하게 비어있는 무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스승의 시신을 어딘가로 은폐한 후 부활하였다고 거짓을 퍼트린다는 유대인들의 소문(시신도난설)에 부러 반박하기 위한 면이 강합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소생한 몸에 대해 강조했어야하는데 오늘 복음이 보여주는 장면은 아무 것도 없는 빈 무덤이니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왜냐하면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부활이 단순히 물리적인 육체의 소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나중에 첨가된 부분인 21장을 보면 이 부활의 의미를 더욱 확연히 깨닫게 됩니다. 스승의 죽음으로 풀이 죽은 제자들은 생업으로 돌아갑니다. 밤새 그물질을 했지만 허탕을 치고 있다가 부활한 주님을 만납니다. 스승의 말대로 깊은 곳에 그물을 치고 고기를 낚아 올립니다. 뭍에서 제자들을 기다리던 스승은 그새 불을 피워 아침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낚은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얻어 손수 밥을 지어주십니다. 제자들은 그제야 그분이 살아생전 그토록 애틋하게 자신들과 함께하던 스승임을 깨닫습니다. 익히 알고 있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은 동행하고 있는 인물을 스승으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날이 저물어 숙소에 들어가 빵을 떼어 나누어 먹을 때에 가서야 비로소 스승임을 알아봅니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제자들이 부활한 스승을 곧장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한 스승을 알아보는 순간은 모두 살아생전의 행동이 재현되는 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부활은 어떤 소생한 육신이나 초자연적 상태로 변한 몸에 대한 고백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남겨진 제자들 사이에서 다시 되살아나는 살아생전 예수와 함께 했던 행동의 반복, 곧 그분 삶의 재현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은 매우 치밀하게 이러한 상징들을 잘 갖추어 놓았습니다. 낙담한 제자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알다시피 낚시를 업으로 삼던, 그 분야의 전문가들입니다. 낚시에 대해 문외한인 스승이 요구한다고 깊은 곳에 그물질을 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느낌입니다. 그럼에도 그리하는 것은 부활한 주님을 만나는 자리는 매일 반복되고 익숙한 일상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곧 소생한 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제부터 삶을 살아야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소생한 육신의 주님이 아니라 부활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비어있는 무덤은 이렇게 본다면 매우 의미심장한 신앙고백입니다. 단순히 다시 살아난 육신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란 것을 웅변적으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고 또 ‘부활한’ 주님인 이유는 그분의 삶을 제자들이 복기하고 기억하고 되새기고 재현하기 때문입니다. 끊어진 목숨이 다시 살아나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어진 목숨이 다시 다른 이들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곧 거행될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는 하느님 편에서는 세례자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우리들 편에선 이제 내 삶으로 주님을 재현하는, 부활한 주님의 증인으로 살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따라서 잊지말아야할 것은 저 부활한 주님을 만나는 자리는 어떤 제3의 특수한 공간이 아니라 매일 부대끼고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승리하고 패배하는 우리의 삶, 일상의 공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새벽 어스름 무덤을 찾은 제자들을 정작 시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똑 같은 새벽 어스름, 자신의 일터에 있던 제자들은 부활한 스승을 마주하게 됩니다. 부활은 그렇게 만나기 위해 찾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밭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새벽 어스름, 늘 더듬거리며 주님을 찾겠지만 스승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어떤 공간에서 만나는 주님이 아니라 오히려 평범한 내 하루에서 ‘알아보는’ 주님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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