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다 (강론)

숨겨진 빛(2018년 1월 7일 주님공현대축일)

바깥 주인장 2018. 1. 6. 23:47

2018년 1월 7일 주님공현대축일

마태오 2, 1-12


아기 예수를 처음 목격한 것은 루카 복음에서는 목동들인 반면 마태오는 동방박사들입니다. 이런 불일치는 예수의 탄생과 얽힌 이야기들이 사실의 보도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상상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복음이라는 애칭처럼 루카는 시종일관 가난한 이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드러내는 예수를 그리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를 처음 목격하는 이들도 가난한 목동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 재미없는 예수의 족보로 시작되는 마태오 복음은 예수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아라는 신원을 드러내기 위해 고귀한 신분의 박사들이 첫 목격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엇갈리는 탄생 이야기. 그러나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모두 예상치 못한, 그래서 ‘당황스러운 장면’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구원자를 처음 목격하는 지상의 사람이 비참한 삶을 살던 목동들이었다는 사실이나 귀한 물건을 선물하려 먼 길을 찾아온 지체 높은 사람들이 당도한 곳이 결국 왕이 있는 수도가 아닌 베들레헴이라는 작고 보잘 것 없는 변두리 마을의, 그것도 여물통에 누워있는 아기라는 사실이나 모두 당황스러운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고대하던 메시아, 세상을 구할 구원자라면 태양처럼 빛나고 임금처럼 고귀한 모습이어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굳이 아기처럼 ‘작고’ ‘약하고’, 베들레헴처럼 ‘하찮고’ ‘희미한’ 모습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공현 대축일은 말 그대로 공적인 드러남, 예수가 비로소 세상에 드러났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 드러남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습니다. 유대인들이 고대한 그 메시아는 동방에서 찾아온 외국인 현자들이 상징하듯 유대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민족들의 메시아였던 것이고, 높고 존귀한 모습이 아니라 작고 약하고 하찮은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통해 이 세상에 들어온 구원의 빛은 모든 이를 비추는 빛이지만 희미하고 깜빡이고 심지어 숨겨진 빛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두의 빛이지만 숨겨진 빛! 모순이지만 이보다 우리의 신앙 여정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없어 보입니다. 성서 속에 등장하는 군상들은 다양합니다. 예수를 보지만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하고 스쳐지나가기도, 기대와는 달라 실망해 떠나기도, 두려움에 배신하지만 결국엔 그의 제자로 목숨까지 바치기도 합니다. 모두 ‘목격’했지만 그렇다고 모두 알아본 것은 아닙니다. 별은 모두 보았지만 모두가 쫓은 것은 아닙니다. 별을 쫓지만 목적이 같은 것도 아닙니다. 누구는 경배를 위해 누구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박사들은 별빛을 상서롭게 바라보며 희망을 품었지만 헤로데는 자신의 자리가 불안해 두렵게 바라봅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초대되었지만 모두 아버지의 잔칫상에 앉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문이지만 모두가 문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빛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두를 비추는 세상의 빛이지만 그것은 희미하고 숨겨진 빛입니다.


별을 바라보기엔 주변이 너무 밝습니다. 별은 분명 저 하늘 위에 있지만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 주위의 불을 꺼야합니다. 들판으로 나가야합니다. 도심의 불빛들 속에선 보이지 않는 별빛입니다. 도심의 빛, 내 주위의 빛들은 ‘익숙한 것’들입니다. 당장 걱정할 것과 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숨 가쁘게 살아가고 열심히 땀 흘려 일한다고 자부하지만 기쁨이 없고 똑같은 하루의 반복 같습니다. 익숙한 길로 익숙한 이들과 익숙한 음식에 익숙한 웃음에 익숙한 것들에 휩싸여 들판으로 나갈 짬이 없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하찮은 마을과 여물통 위라는 보잘 것 없는 자리는 익숙하지 않은 것들입니다. 아니 기대와는 너무 달라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있지만 분명하지 않은 것이고 심지어 그 뜻은 숨겨져 있습니다. 성서는 집으로 돌아간 박사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우리 신앙 여정의 시작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려줍니다. 익숙한 ‘책’들과 ‘권좌’와 ‘가족’을 떠나 낯선 초행길에 나설 용기입니다. 책은 세상의 통념이고 권좌는 내가 믿는 힘이며 가족은 익숙한 환경을 의미합니다. 신앙은 어쩌면 이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는 것이며 스스로를 낯선 곳에 처하게 하는 것이고 진짜 빛을 보기위해 다른 불들을 끄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내가 계획한 루트가 아니라 별이 가는 방향을 신뢰하고 그 빛에 순명하는 발걸음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고 심지어 천신만고 끝에 가 닿은 목적지가 변두리 마을에 가난한 젊은 부부의 갓 태어난 아기처럼 당황스러운 것일지라도 그 속에 숨겨진 참 빛을 알아보는 눈썰미이기도 합니다.


빠르고, 화려하고, 빛나고, 풍족한 불빛들로 진짜 별을 찾기 힘든 시대입니다. 신앙인 개인으로도 교회에게도 어려운 시절입니다. 연일 터지는 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에 마음이 참담합니다. 드러내야할 것, ‘공현’할 것은 세상의 빛인데 어쩌자고 이 교회는 자신의 치부만을 드러내고 있는지. 그러나 이 부끄러운 드러남 역시 ‘공현’입니다. 그것도 거룩한 공현, 참된 공현입니다. 여태껏 세상의 익숙하고 밝은 불빛에 취해 바라보지 못한 빛을 찾는 시간입니다. 오히려 더 낯설고 어둡고 가난하고 하찮아져야합니다. 그래야, 그때만이 비로소 목숨 같은 복음을 다시 되찾을 수 있습니다. 남은 것은 신뢰입니다. 빛이 이끄는 경로에 대한 신뢰입니다. 낯설고 혼미하지만 빛의 루트를 신뢰하던 박사들처럼 이 여정을 내가 아닌 그분이 이끄는 여정대로 걷는 믿음을 청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