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다 (강론)

나를 참아주고 견디어준 기억의 힘, 용서(2017년 6월 25일 연중 제12주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 주간)

바깥 주인장 2017. 6. 25. 08:10

2017년 6월 25일 연중 제12주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

마태오 18, 19-22


용서란 단어만큼 자주 듣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단어도 없습니다. 시대마다 새롭게 출현하는 신조어가 있듯이 문화의 변화와 함께 의미가 달라지거나, 사멸, 박제되는 단어들도 있습니다. 용서라는 단어 역시 사멸의 길에 접어든 단어 중 하나인 듯합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들이 세상의 사정이 좋아져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악화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용서를 한 적도 받은 적도 없으니 그 느낌을 표현하는 말도 사라지는 법이지요. 실제로 용서란 단어를 검색해보니 거의 모두 종교관련 사이트나 글들에 포함되어 등장할 뿐입니다. 현실에 맥을 못 추는 종교처럼 용서란 단어 역시 실제적인 삶과는 동떨어진 추상적인, 또는 소설과 설교대에서나 등장하는 표현이 되어 버린 셈입니다. 사실 분쟁과 갈등, 다툼과 같은 용서가 회자될 법한 상황들에 최근 오히려 더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대화나 소통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갈등이나 죄로 왜곡된 관계들을 다시 회복하고 이어붙이는 용서의 목적과 비슷해 보이는 이 단어들은 과연 실제로도 용서와 같은 것일까. 언뜻 보아서는 같은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대화나 소통은 대체로 어디까지나 대등한 입장의 서로가 서로의 요구와 이해를 관철시키는 과정을 뜻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대등한 입장 사이만이 아니라 절대적 힘의 불균형 사이에도 벌어지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대화나 소통은 그것이 가능한 상황이 먼저 구축되어야하는 조건적인 것이라면, 용서는 전제되는 조건 없는, 무조건적이고 무상적인 행위입니다. 조금도 손해 보기 싫어하는 세상에서, 아니 참아주고 양보하면 오히려 얕잡아 보고 더 탈탈 털어가는 이 험악한 세상에서 어쩌면 용서는 더 이상 불가능한 체험일 수도 있겠습니다.


맞습니다. 용서는 사실 이문을 생각하지 않는 밑지는 장사라 결심으로만 이루기 힘든 일입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이 말의 어원을 보면 더 그렇습니다. 얼굴 용(容)에 용서할 서(恕)입니다. 다시 말해 얼굴을 마주보고 너그럽게 봐주는 것이라, 더럽고 치사해 외면하고 없는 사람 취급하거나, 애써 잊고자하는 것과는 구별되는 행위입니다. 화가 내 속에 여전히 가득한데 얼굴을 보면서 너그럽게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외국말에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영어로 forgiveness, 이태리 말로 perdono. 불어로 pardon. 모두 “주다”라는 말에 “위하여”란 말이 합성된 형태입니다. 주는 것을 위하여, 또는 “내어주기 위해”란 뜻입니다. 대화와 소통은 서로의 요구를 합의를 통해 도출하는, ‘주고받는 교환’의 느낌이 강하다면 용서는 주는 것, 내어놓는 것에 방점이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돌려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아니 그것과 상관없이 내어놓고 주는 것이 용서란 말입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이 험악한 세상에서 왜 용서란 말이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누가 밑지는 장사를 하고 싶어 하겠습니까.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 유괴 범죄로 자식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던 주인공이 교회에 나갑니다. 그곳에서 신앙체험을 한 주인공은 이제 살인범마저 용서할 수 있다고 자신하곤 교도소의 그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녀가 마주한 것은 그녀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죄인이 아니라 교도소 안에서 종교를 통해 하느님께 자신은 이미 용서받은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평안한 얼굴의 남자였습니다. 그녀는 일순간 충격에 빠지고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이미 스스로 용서받았다고 주장하는 살해범을 그 이전보다 더 증오하게 됩니다. 사실 그녀는 자신의 용서에 감지덕지 감읍해하는 살해범의 머리 조아림을 기대했던 것이겠지요. 무상과 무조건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 그 조건에 맞지 않는 현실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영화 속 이야기라고 하기엔 사실 용서에 능하지 못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리 어려운 일이 있을까요. 용서는 용기나 결심으로만 이룰 수 없는 버거운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용서합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참아주었는지 잠시 헤아려봅니다. 나를 참아주고 견뎌준 이들이 없었다면 철부지 나는 어떻게 이렇게 두발로 설 수 있었을까. 오늘 독서와 복음을 관통하는 것 역시 하느님의 인내, 용서입니다. 불충한 백성에게 매번 백지 답안지를 꺼내주는 마음 여린 하느님(1독서), 자신을 통째로 내주면서까지 인간을 용서하고 사랑했던 한없이 너그러운 하느님(2독서). 복음에서 이야기하는 7이라는 숫자는 유대인들의 사고 안에서 꽉 찬 숫자로 더 이상 더할게 없는 것임에도 스승은 그 충만한 일곱을 일흔 번 반복하더라도 용서하라 말씀하십니다. 숫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한없이,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나를 참아주고 견뎌준 은인들, 부모와 형제, 동료들의 인내를 보아서라도, 나는 모질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이리도 참아주고 돌보고 견디어주었는지 기억한다면 우린 용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힘겹지만 어떻든 우리가 가야할 길이 이 용서의 길, 쌍방이 주고받는 거래가 아니라 조건 없이 너를 향해 나를 내어주는 길임을 알게 됩니다. 적어도 오늘 우리는 용서할 수 없거든 용서할 용기를 청해야겠습니다. 적어도 나를 견디어주고 품어준 이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용서는 막연히 착하게 살아야한다는 어떤 당위만은 아닙니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2차 세계대전의 원흉, 독일은 전 유럽을 향해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 용서는 세 단어로 압축됩니다. “기억과 책임 그리고 미래”입니다. 나를 박해하고 고통을 안겨주고 업신여긴 사실을 잊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작정 덮어놓는 것도 상책은 아닙니다. 따져 물을 것은 물어야 상처가 아무는 법입니다. 기억할 수밖에 없고 또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나 그 기억은 앙갚음을 위한 기억이라기보다는 다시는 그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기억이어야 합니다. 똑똑히 기억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따져 묻되 내일을 위한 일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미래란 전망 없이 오늘에 매몰되어 서로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보다 어리석고 파멸적인 일은 없습니다. 기억이 치유가 되기 위해선 또한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분명히 사과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야합니다. 독일은 실제로 국제법적인 배상을 모두 마쳤음에도 기회가 될 때마다 용서 구하길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이 피해자들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내일, 미래를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참 슬픈 운명의 민족입니다. 나라를 빼앗겼다 해방을 맞은 지도 잠시, 이유도 알 수 없는 전쟁에 또 다시 휩쓸린 힘없고 기구한 백성. 남한 52만 사망, 94만 부상, 43만 실종. 북한 70만 사망, 180만 부상, 80만 실종. 숫자로 도저히 가늠할 수도 없는 끔찍한 상처입니다. 세계대전으로 형성된 공산진영과 자유진영 간의 긴장이 물리적 충돌로 이어진 전쟁. 한국전쟁은 사실 우리의 운명을 볼모삼아 치러진 ‘대리전’인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상처가 오늘의 우리를 여전히 붙들고 있습니다. 상식이 좌익으로 폄하되고 인간적 연민과 도리가 정치로 호도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얼마나 자주 경험합니까. 역사가, 과거에 대한 기억이 내일과 미래로 나아가는 힘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볼모삼아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게 만드는 형국입니다. 국론과 애국이라는 미명하에 피붙이를 잃고 통곡하며 곡기마저 끊은 부모들 앞에 보란 듯이 폭식을 하던 몰상식한 이들을 우린 기억합니다. 우리가 그해 여름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보았던 것은 짐승만도 못한 인간만이 아니라 현실을 옥죄고 내일로 가는 길을 틀어막는 장애물이 되어버린 힘없는 백성의 슬픈 역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잔혹했던 과거와 슬픈 상처를 분명히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내일을 위한 기억이어야 합니다. 내일을 열고 미래를 약속하는 교훈과 지혜의 역사이어야 합니다. 그 기억이 끝없는 증오와 공멸이 아니라 상생과 화해, 치유로 공동의 운명을 개척할 힘이길 기도합니다. 결국, 용서의 길입니다. 믿는 이들은 더욱이 이 길의 깃발과 같은 존재들이어야 합니다. 나를 견뎌주고 참아준 그 누군가를 기억하는 힘으로, 나도 그 누군가에게 그를 인내하고 품어주는 기억으로 펄럭이는 깃발 말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살해당한 성직자들과 수도자, 평신도들의 순교를 기억하지만 동시에 갈등과 긴장을 부추기는 북을 성토하기 보다는 통일을 위해 인내로 대화하길 포기하지 않는 것도 우리 한국교회입니다. 그것은 모순된 행동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기억이 증오가 아닌 내일을 위한 기억이길 희망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우리가 멈추지 않고 힘차게 펄럭이는 용서의 깃발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