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다 (강론)

두개의 빵(2017년 6월 18일 성체성혈대축일)

바깥 주인장 2017. 6. 18. 13:40

2017년 6월 18일 성체성혈대축일

요한 6, 51-58

 

유럽 미술관 기행을 가겠다는 일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제가 맡은 일은 프라이팬, 주전자 따위의 모양으로 찍혀 나오는 쇠그릇의 바닥을 코팅 액이 잘 스며들도록 고르게 금강석 가루로 거칠게 만드는 공정이었습니다. 안하던 일이라 그런지 종일 서서 하는 작업이 고됐습니다. 요령이 없어 공장 식당에서 마음대로 먹어도 좋다고 양은 대야에 한가득 쌓아놓은 밥을 서너 번 덜어 먹을 정도로 허기도 쉬이 느꼈습니다.

야근 후 퇴근 버스에서 쪽잠을 자느라 집 앞 정거장을 지나치기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몇 차례, 막차도 끊어진 시간이라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어느 밤이었습니다. 그 밤길에서 언젠가 보았던 한 부자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야근을 했는지 아버지는 아들을 한쪽 품에 안고 버스 좌석에서 졸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아빠를 연신 깨우지만 그때뿐, 떨궈지는 고개는 어쩔 수 없어 보였습니다. 야근을 한 아버지가 아이를 어디론가 데려다주는 모습 같았습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그때는 그 고단함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차로 종점까지 다다른 그 밤, 그 부자의 모습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습니다. 이 땅의 아버지라면 누구나 짊어질 고단함이 고스란히 피부로 와 닿는 밤이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고 더욱이 나 이외의 누군가를 먹고 입히는 책임은 참으로 무거운 것이지요. 그때 그 밤이 없었다면 전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내 아버지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 가끔 상상하곤 합니다. 생각해보면 참 고마운 밤입니다.


고해실에서, 다른 이유도 아니고 정말 일하느라 주일을 지키지 못했다는 분들을 만날 때면 사실 할 말이 사라지곤 합니다. 모두들 주말이면 캠핑이다 여행이다, 여유롭고 풍족한 삶만 있어 보이지만 고해실에서 듣는 세상은 여전히 고단하고 힘겹습니다. 먹고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삶도 돌보셔야 한다는 막연하고도 무정한 말을 궁색하게 늘어놔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를 먹이고 살리려 나눠주는 예수님은 그렇게 한낱 전례적 상징, 은유적 표현일 뿐일까. 낭패감과 함께 불경스런 반문도 일어납니다.


브라질의 헬더 까마라 대주교도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어느 날 가난한 산간 지역을 사목하던 사제가 찾아와 더 이상 자신의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을 것 같다고 보고합니다. 이유는 오랜 기근과 군부의 수탈로 먹을 것이 정말 없어 굶주린 이들이 미사를 참석하기 위해 성당까지 찾아올 기력조차 없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주교는 어떤 심정으로 그 밤을 지새웠을까. 매일 생명의 양식을 나누는 자신의 미사가, 성찬례가 얼마나 무력하고 허망하게 느껴졌을까. 그러나 대주교는 무력감에 먹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날로 군부독재와 오랜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과 노동자들의 참혹한 삶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이내 그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데 남을 생을 온전히 쏟아 붇습니다. 마치 말에서 굴러 떨어진 사울이 바오로로 거듭났던 것처럼 그날 이후 대주교는 줄곧 그들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 스스로 빵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어준 살과 피가 까마라 주교를 통해 실제로 가난한 이들의 배를 채우고 목숨을 건지는, 거룩한 성찬의 변화, ‘성변화’로 변모한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묵상해야할 성체성혈의 참된 의미가 깃들어있습니다. 성변화는 비단 미사 중의 ‘실체 변화’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살과 피는 이를 받아 모시는 이들의 변화로 이어져야합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 살과 피는 다름 아닌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기억은 삶으로 재현되는 법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예수의 살과 피는 그의 한생, 다름 아닌 가난한 사람들에게 남김없이 자신을 바친 그의 삶 전체입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그 기억을 먹은 우리가 나눠야할 것은 우선 실제로 굶주린 이들을 채우는 빵, 진짜 음식인 것입니다. 까마라 대주교가 남은 삶을 쏟아 부어 마련하고자 했던 그 빵처럼 말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기도 중에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배부른 자의 사회적 책무정도론 성에차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쌀을 나눠주고 밥을 날라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밥은 다양합니다. 아무리 재간을 부려도 빵을 얻을 수 없는 비정상의 현실을 고발하고 개선해나가는 일도, 정직한 땀을 배반하는 불의에 저항하는 것도 거룩한 만찬으로의 참여인 것입니다. 상징이 아니라,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정말로 씹을 수 있는 빵, 먹을 수 있는 밥 한 그릇(1)을 나눠야합니다. 성당 입구 성미함에 모여지는 저 쌀은 그렇게 따진다면 그런 진짜 밥을 나눌 우리 능력의 작은 표지, 더 큰 쌀독을 마련하고 더 큰 솥에 밥을 지어 나눌 수 있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약속인 셈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쌀인 것입니다. 성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한편 그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신 사람은 씹을 수 있는 빵을 다른 이와 나눌 능력만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또 다른 빵(2)을 얻게 됩니다. 복음은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라 증언합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얻게 된다는 생명의 양식은 생을 마감 한 후 얻게 될 어떤 초시간적 평화, 영원한 안식만이 아닙니다. 그를 받아 모시며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정말 영원히 삽니다. 목숨은 빼앗아도 정신은 훔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나눔의 성찬에 참여하며 충만한 나를 발견하곤 합니다. 남들에게 나눠주어 조금은 가벼워지고 가난해졌지만 오히려 한껏 고양된 나를 느낍니다.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이 이해되는 대목입니다. 그런 충만함을 혹자는 불멸의 유산, 빛나는 정신, 진정한 가치, 거룩한 열정으로 부르기도 하겠습니다. 나는 쪼개지고 헐거워지고 가난해졌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온전하고, 충만하고, 부유합니다. 여기에 바로 성체성혈의 신비, 성찬의 정수가 담겨있습니다. 빵, 밥은 무엇입니까. 빵은 먹히고 나눠질 때 비로소 빵의 구실을 다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형체로는 얻을 수 없는 이름, 그것이 또한 우리가 그토록 얻고자하는 생명의 빵입니다. 죽어야 살고, 낮춰야 높아지는 하느님의 역설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나눠준 생을 집어 삼킨 이들, 생 전체의 기억을 통째로 먹은 우리는 이제 그처럼, 아니 그로서 사는 셈입니다. 그리스도를 입고, 아니 이제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산다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허튼 소리일 수 없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나를 쪼개고 낮추고 부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구원처럼 힘겹고 좁은 문입니다. 마음처럼 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이 나눔이 이루어진 자리가 식탁의 자리였음을 기억해야합니다. 둘러앉은 공동체의 자리였습니다. 예수의 곁을 지켰던 이들조차 두려움에 방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별 볼일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안위에 대한 걱정과 불안, 두려움으로 움츠려든 그들이, 그 못난이들이 서로를 격려했음을, 북돋았음을 기억해야합니다. 격려로, 다짐으로, 형제애로 그들은 골방을 나와 광장에 섰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 작은 공동체, 이 곳 역시 그런 만찬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통해 위로받고 격려하고 구원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성찬이 곧 우리요 우리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너희는 이를 기억하여 행하라” 성찬례의 가장 핵심인 이 구절을 다시금 새겨봅니다. 기억하고 행하라. 이보다 무겁고 이보다 확실한 구원의 보증은 없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