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다 (강론)

두 제자의 달음질(2017년 4월 15일 부활성야)

바깥 주인장 2017. 4. 16. 15:02

2017년 4월 15일 부활성야

마태오 28,1-10

 

파리 센강에 면한 오르세이 미술관은 회화 작품으로만 이루어진 미술관입니다. 드가, 세잔, 고갱과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아름답고 하나같이 인상적입니다. 부활날이면 전 거기서 본 작품하나가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동이 막 터 오르는 아침, 두 남자가 길을 달립니다. 한명은 젊은 얼굴에 다소 긴장한 듯 꼭 다문 입에 두 손을 모으고 있고, 다른 한명은 희끗하고 헝클어진 머리에 볼 것 못 볼 것 다본 초로의 노인입니다. 화면 속 두 인물은 보나마나 예수가 가장 사랑했다는 요한과 제자들의 맏형 베드로입니다. 19세기 인상주의 계열의 유진 뷰르난이라는 화가의 “부활날 아침”(1898)이라는 작품입니다.

 

 

빛의 변화를 순간적으로 포착하는데 탁월했던 인상파 화가답게 그가 화면에 잡아놓은 부활날 아침은 긴장과 설렘, 놀람과 두려움이 뒤엉킨 팽팽함 그 자체입니다. 요한의 흰옷과 베드로의 어두운 색의 튜닉의 대조는 그저 스승을 사랑한 제자의 단순함과 추종과 배신, 두려움과 용기, 약함과 강함을 동시에 오간 중년을 훌쩍 넘긴 베드로의 단순하지만은 않은, 그렇다고 완숙하다고도 할 수 없는 들끓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젊은 요한의 미간이 찌그러져있습니다. 뭔가를 꿰뚫을 것 같은 눈빛입니다. 저 앞의 스승에게 벌써 가있는 눈입니다. 정말 그분일까. 그 모습은 어떨까. 그 모두가 궁금한 열망의 얼굴입니다.

반면 베드로의 두 눈은 놀란 듯 커져있지만 저 앞을 주시하는 눈빛에는 초점이 없어 보입니다. 옷깃과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속도감 있게 뛰어가고 있지만 마음만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 보입니다. 그물을 버리고 그를 쫓아 나서던 호숫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빛나던 스승, 빵을 나눠주던 저녁의 고백, 그리고 배신의 어두운 밤까지 그의 생각은 그 모두를 두서없이 서성거립니다. ‘왜 나를 배신했느냐’ 물어올 스승이 두렵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추궁을 받을까 걱정이지만 한편으로는 통회의 눈물로 용서 받고 싶다는 마음이 제멋대로 뒤엉켜있는 얼굴입니다. 그들 뒤로 새벽 여명이 보입니다.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희끄무레한 지평선은 아직 확인하지 못한 부활한 스승을 만나러 가는 제자들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아직은 온전히 밝혀지지 않은 실체, 그 긴장을 향해 두 남자가 달리고 있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달음질의 방향입니다. 대개 해가 떠오르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인물을 배치하는 것과는 달리 뷰르난은 반대 방향으로 인물을 배치했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과 같은 자연의 순리와 익숙한 패턴을 거스르는 구도는 무언가 ‘새로운 것’, ‘예기치 않은 것’, ‘전혀 다른 어떤 것’,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실체’가 달음질의 끝에 있음을 웅변하는 듯합니다. 두 제자는 지금, 형편없이 일그러져 죽어간 스승을 만나러 가고 있습니다. 꺾임 없이 뻗어나가 순식간에 어둠을 밀어내는 빛처럼 죽음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어둠을 거슬러 살아 돌아온 스승의 부활과 어울리는 아침 풍경입니다.

 

이 장면은 사실 오늘 낭독된 마태오 복음의 부활날 아침과는 다른 요한복음 20장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복음 모두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알리면서 시작됩니다. 부활의 선포, 생명의 전언이 다른 누구도 아닌 당대 가장 학대받고 가장 비천하며 가장 소외된 존재인 여성들로부터 시작됨은 의미심장합니다. 끝까지 십자가 밑을 지켰던 여인들이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권세를 이기고 돌아온 스승의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 것입니다. 교회가 이 부활 사건, 곧 빈무덤 사건부터 비롯된 믿음의 공동체라면 이 여인들은 다름 아닌 교회의 첫 선교사들인 셈입니다. 가장 약하고 가장 하찮은 것들을 모아 가장 중요하고 가장 견고한 도구로 사용하는 우리 하느님의 버릇은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빈 무덤입니다. 부활한 몸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무덤이 부활의 실체라니 의아스럽습니다.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은 누누이 사흘 만에 부활할거란 이야기를 했던 스승의 이야기를 정말처럼 꾸미기 위해 시체를 훔쳐 숨겼다는 누명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마태오는 그런 때문인지 아예 부활을 증언할 제 3자로 천사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달려가는 여인들 앞에도 곧장 부활한 스승을 배치합니다. 그러나 부활날 아침 확인한 실체가 빈 무덤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뷰르난이 자연스런 패턴을 거슬러 역주행하는 제자들을 그려 넣은 이유는 어쩌면 그 끝에 확인하는 것이 이 빈 무덤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제자들이 확인한 것이 흔히 예상하듯. 환생해 돌아온 육신, 귀신같은 초자연적 실체가 아니라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 전혀 새로운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미 줄거리를 알고 들어간 영화관이 아니라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만나게 되는 영화의 감흥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다 짜인 각본이 아니라 스스로 인물을 창조하고 역할을 부여해야하는 작가의 빈 원고지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가 떠나고 제자들은 스승이 했던 일을 스승처럼 합니다. 기적을 일으키고 병자를 치유하고 마귀를 내쫓는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발로 쓴 새로운 시나리오, 부활 사건의 연장입니다. 무덤의 주인은 스승이지만 주인이 떠난 자리를 메우는 것은 생기를 다시 얻은 제자들, 부활을 체험한 이들인 것입니다.

 

이 빈 무덤의 의미는 오늘 복음 말미의 예수의 전언과 합쳐질 때 더 확연해집니다. 스승은 자신을 보려거든 갈릴래아로 가라고 이릅니다. 갈릴래아, 그곳은 스승이 공생활 내내 제자들과 떠돌던 곳입니다. 복잡한 시장과 추수가 끝난 들판과, 병마와 가난으로 짓눌린 이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힐난을 만나야했던 곳입니다. 오그라진 손을 폈고, 눈을 뜨게 했고, 병을 고쳐주고, 성전 환전상들의 좌판을 엎은 곳입니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 애환들 사이에서 자신을 다시 찾으라는 말입니다. 텅 빈 무덤은 이 갈릴래아를 만나면서 비로소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부활의 자리가 됩니다. 부활을 체험하는 곳 역시 사람들 사이, 저 세상의 복잡거림들 한 가운데고, 부활을 증언하고 또 다시 재현하는 곳도 그곳입니다.

 

사실 지난 성목요일, 만찬 미사를 끝내고 심란했습니다. 교회의 시간 중 가장 중요한 성삼일의 시작에 이 빠진 듯 듬성듬성한 성전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다들 어딜 갔을까! 꽃놀이 가셨을까! 그런 저를 반성하게 한 것은 함께 미사를 봉헌한 신부들의 말이었습니다. 먹고사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냐. 평일 저녁에 시간을 낼 수 있는 직장인들이 몇이나 되겠느냐. 주5일제라고는 하지만 따박 따박 주일에 쉴 수 있는 일터가 몇 군데나 되겠느냐는 이야기였습니다. 생각해보면 비난 가득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그 빈자리들의 주인들은 일상이라는 고난의 시간을 견디고도 매일 다시 힘을 내는 부활의 증인들 이었던 것입니다. 그럴듯한 영성으로, 신학으로 치장하지 않아도 모두가 빈 무덤의 새로운 주인, 갈릴래아에서 만날 사람들인 것입니다. 본당에 온지 3개월 남짓, 저는 지난 몇 달 전까지도 가깝게 만났던 이 일상의 영웅들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본당이라는 작은 울타리에서 실제적 삶이 빠진 전례라는 껍데기만을 핥으며 신앙을 운운했던 것이지요.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일입니다. 살아있는 스승을 만나려면, 부활을 몸소 껴안으려면 갈릴래아라는 일상의 자리에 더 깊숙이 들어 가야함을 어느새 잊었던 것이지요.

 

오늘 우리의 빈 무덤과 길릴래아는 어디입니까. 결국 일상의 자리, 이 번잡하고 소란스러우며 전혀 평화롭지 못한 저 밖의 세상인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감격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헌신이, 위로가, 또 희생과 치유가 무엇인지를 똑똑히 보여주는 부활의 증인들을 만납니다. 해가 떠오르는 방향을 거슬러 달려가는 제자들이 당도할 곳은 빈 무덤이라는 새로운 원고지이며 갈릴래아라는 새로운 줄거리입니다. 그 제자들의 경주 안에 우리가 들어있음은 물론입니다. 저 등 뒤로 여명이 밝아옵니다.

 

그러나 일상은 밋밋합니다. 그것은 마치 갯바위 사이에 박아놓은 십자가에 몸을 매달아 서서히 탈진하게 해 죽이는 형벌을 받은 일본 순교자들의 최후를 지켜보며 ‘침묵’의 주인공이 읊조린 참을 수 없는 바다의 ‘단조로움’과 같습니다.

 “아무 뜻 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그 소리, 그 바다의 물결은 시체를 아무 감동 없이 씻어 삼키고, 그들의 죽음 뒤에도 똑같은 표정을 하고서 저기 저렇게 펼쳐져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저 바다와 마찬가지로 침묵만 지키고 계십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만약 하느님이 안 계시다면 인간은 이 바다의 단조로움과 그 무서운 무감동을 어떻게 견디어 낼 것인가!”(침묵 117)

 

맞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저 주인공의 무감동의 바다와 같은 그저 견뎌야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부활을 사는 이들입니다. 이 침묵의 바다에 매몰되지 않고 스스로 희망의 근거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내주고 털어주고 다 벗어주는, 이 견디기 힘든 일상에서 일탈을 감행하고 저 멀리 새벽 여명 너머의 빛을 주시하는 이들입니다. 뷰르난의 제자들이 빛이 아닌 어둠의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 역시 이 때문입니다. 빛을 만나려거든 오히려 저 어둠 속으로, 평화를 만나려거든 저 시장의 소음 속으로, 부활한 스승을 만나려거든 저 견디기 힘든 일상의 단조로움으로, 하느님이라는 풍요로움을 소유하려거든 인간이라는 가난을 껴안으려 내달려야하는 것입니다.

 

세월호는 까마득한 어둠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빈 무덤이고 우리가 도달해야할 부활 이후의 갈릴래아입니다. 삼년 전 성주간 수요일 아이들과 함께 죽은 스승이 아이들과 함께 뭍으로 돌아온 오늘은 부활날입니다. 모두가 다 잊어도 스승은 잊지 않은 것입니다. 이제 나머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의 하루를 신명나는 갈릴래아로, 저 어둠을 희망으로 만드는 것도 우리입니다. 이제 막 복음이 끝나고 새로운 사도행전이 펼쳐졌습니다. 우리가 쓰는 사도행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