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다 (강론)

눈물은 힘이 세다(2017년 4월 2일 사순 제5주일)

바깥 주인장 2017. 4. 2. 14:41

2017년 4월 2일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눈물 흘리는 하느님. 어색합니다. 신이 눈물을 흘리다니요. 복음은 예수의 감정 묘사에 인색합니다. 기껏 묘사되는 감정은 분노와 측은이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슬픔의 감정은 더 희박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초세기 교회가 인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하느님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인성보다는 신성을 더 부각시키려다 생긴 특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분노와 측은은 대개 자신보다 아래 사람을 대할 때 가지는 감정이기에 어쨌든 인간을 바라보는 신에게 어울릴 법하지만, 슬픔은 높낮음에 상관없이 스며드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복음을 통틀어 예수는 세 차례 눈물을 흘리는데, 그 하나는 겟세마니에서 흘린 피땀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 도성을 내려다보며 흘린 눈물(루카 19장)이며, 마지막은 오늘 복음에 해당하는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흘린 눈물입니다. 첫째는 다가오는 시련 앞에 인간이 느낄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을 상징한다면, 두 번째는 곧 멸망할 존재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일 것입니다. 세 번째 눈물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 흘릴만한 눈물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세 번째 눈물을 라자로 사화 안에서만 세 차례나 반복하며(“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져”, “눈물을 흘리셨다”,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강조합니다. 복음에서 흔하지 않은 예수의 슬픔이라는 감정을 한 사화에 집중해서 반복해 넣은 연유는 무엇일까.

요한복음은 유대교 회당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히 추방되는 100년경에 작성된 것입니다. 곧 유대교로부터의 완전한 독립, 그리스도교가 자의식을 확립한 시기입니다. 그 이전에 쓰인 공관복음은 예수를 직접 목격한 세대들로서 예수를 인간이 아닌 우선 신으로 부각해야한다는 일종의 소명의식이 강했을 것입니다. 반면 요한복음은 자의식을 이미 확보된 공동체이기에 외부를 의식하지 않은 채 예수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반추하는 시기로 그의 신성이나 인성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도대체 그가 왜 자신들의 구원자인지를 먼저 묻고자 했을 것입니다. ‘반추’이기에 요한의 예수에 대한 고백은 매우 ‘귀납적’입니다. 그가 메시아이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대전제로 출발하여 그에 걸 맞는 행적이 전개되는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은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예수의 행적을 통해 거꾸로 예수 안에 깃든 구원자 하느님을 깨닫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사화 속 예수는 마르타와 마리아, 라자로라는 형제자매와 매우 사적이고 구체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냥 육신만으로 인간을 취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구체적인 인간관계와 삶의 소소한 애환에 얽혀있는 그를 봅니다. 거듭되는 눈물과 북받치는 마음은 그가 라자로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했음을, 그 감정이 보통의 사람들이 지닐법한 뜨거운 감정이었음을 강조합니다. “벌써 냄새가 나는” 죽은 이를 되살려낸 것은 예수의 라자로를 향한 진심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사적이고 구체적이며 인간적인 예수의 사랑이 거기서 끝이라면 그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신통한 능력의 소유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구체적 사랑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구한 고귀한 사랑임을, 희생의 열매임을 강조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라자로가 있던 베타니아는 예수가 목숨을 위협받을 만큼 위험한 유다지방 한가운데 지역입니다. 유다 밖에 머물던 예수가 라자로의 소식을 듣고 죽을 수도 있는 유다로 다시 길을 재촉한 것입니다. 토마스가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라고 말 할 만큼 당시 유다는 목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할 만큼 예수에게 적대적인 곳이었습니다. 실제로, 오늘 복음으로 낭독되지 않은 같은 11장 후반부에는 라자로를 되살린 이 사건이 최고의회가 예수를 죽이기로 마음먹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고 기술됩니다. 그는 이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간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그를 살리러 간 것입니다.

무덤 앞에 이르러 외칩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무덤에서 밖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건져 올리는 그 목숨은 신통한 능력이 아닌 자신의 목숨을 대신 맞바꿔 구한 목숨입니다. 구체적이고 사적이며 인간적인 사랑이 비로소 거룩한 대속, 고귀한 희생, 숭고한 사랑으로 변모합니다. 요한의 하느님은 전능으로 생명을 다시 부여하는 여느 신과는 달리 자신의 목숨을 맞바꿔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하느님입니다. 그런 하느님을 요한은 라자로를 무덤에서 꺼내는 인간 예수의 모습에서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인간적인 사랑이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숭고한 신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참다운 인간다움이 참다운 거룩함과 맞닿아있는 것입니다. 찰라가 영원과, 유한이 무한과, 구체가 보편과 만나는 순간입니다.


대개 사순시기가 되면 인류를 위해 고통을 당하신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자는 권고를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러면서 예수가 받은 육체적 고통과 그 잔혹성이 부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이유는 그가 감내한 극도의 고통과 잔혹한 죽음 때문일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더 잔혹하고 더 고통스럽고, 더 무의미한 죽음들이 즐비하기 때문입니다. 잔혹의 강도가 결코 예수를 우리의 구원자로 고백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한낱 인간의 비천함을 뒤집어쓰고 고난당했다는 이례적인 모습 때문도 아닙니다.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인 이유는 그가 보여준 “목숨을 건 사랑” 때문입니다. 라자로라는 한 사람을 구하려 자신의 목을 내놓길 마다하지 않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관념적인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을 위해 온전히 자기를 내준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애틋한 사랑이 우리가 그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순은 인간이 하느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시간이기 이전에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는 하느님의 시간인 것입니다. 침울한 표정으로 죄를 더듬는 시간이기 이전에 내 삶의 애환에 동참하는 하느님으로 위로 받는 시간입니다. 죄책감의 시간이라기보다 용기를 얻는 은총의 시간인 것입니다. 나의 오늘의 곡절에 동참하는 하느님, 얼마나 든든합니까. 나를 위해 목 놓아 울어주는 하느님, 얼마나 눈물겹습니까.

3년 전 성주간 수요일 세월호가 바다로 가라앉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올해 부활날은 참사가 일어난 지 꼭 삼년 되는 날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세월호가 인양되었고 실종자들의 시신도 곧 수습되어 가족들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 감정이 교차되는 순간입니다. 무죄한 죽음들, 숱한 눈물들, 무덤 같았던 시간이었습니다. 그간 이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두고 벌어졌던 온갖 논쟁과 갈등, 참담한 언사들은 우리 시대에 드리워진 죽음의 문화가 얼마나 짙은지 여과 없이 보여주었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냉담함, 인간 존엄을 압도하는 경제라는 야만, 거짓과 기만위에 세워진 천박한 풍요. 그 거대한 어둠을 뚫고 새로운 희망이 물속에서 건져져 다시 밝은 뭍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부모들과 가족들이 흘렸던 눈물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 포기하지 않았던 눈물은 분명 이 사회가 잃었던 가치들을 다시 뒤돌아보도록 한 힘입니다. 그 눈물이 구한 것은 아이들의 시신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생명이기도한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부활은 대단한 사건이기도 하지만 매일 일어날 수 있는 일상이기도 한 것입니다. 라자로를 살렸던 것 역시 예수의 전능이 아니라 한조각의 진심, 목숨을 맞바꿀만한 사랑, 진실한 눈물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눈물은, 진실한 눈물은 힘이 셉니다. 누군가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