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다 (강론)

분별의 시간(2017년 3월 5일 사순제1주일)

바깥 주인장 2017. 3. 6. 00:31

2017년 3월 5일 사순제1주일

마태오 4,1-11


사순시기마다 듣게 되는 오늘 복음의 예수의 단식과 유혹을 진심으로 공감하게 된 경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20일간 단식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가장 고비는 삼일까지였습니다. 살을 빼는 것이 목적이었더라면 덜 했을 수 도 있겠지만 허기와 함께 예민해진 감각기관은 정말 대단한 유혹이었습니다. 처음 단식하던 때, 비 오는 날 어디선가 묻어오던 삼겹살 냄새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눈을 감으면 먹고 싶은 음식이 가물거렸고, 떡볶이 따위를 파는 길거리 음식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입안은 금세 흥건해졌습니다. 곤욕이었습니다. 호기롭게 끼니때가 되면 먹고 싶은 메뉴들을 단식자들끼리 서로 주문하며 음식 노트를 작성하며 허기를 웃음으로 달랬습니다. 단식을 풀고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이상하게도 그 때 간절히 원했던 음식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단식의 또 하나의 고비는 신체 중 가장 약한 곳이 느끼는 통증이었습니다. 음식물의 독기를 빼내고 아이처럼 깨끗해지는 신체는 지금까지 혹사당했던 장기들을 치유하느라 통증을 유발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일종의 자연치유 과정인 것입니다. 처음 단식에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다음 단식에는 위가 아팠습니다. 이 고비를 넘기고 나면 평안해집니다. 머리도 맑아집니다. 세상의 이치를 모두 꿰뚫을 수 있을 것 같은 맑아진 정신을 경험하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단식은 자기 관성과의 싸움이고 세상이라는 유혹과의 투쟁입니다. 거기에 동반되던 고통은 치유를 위해 거쳐야할 과정인 것입니다. 실제로 짐승들은 병이 들면 곡기를 끊습니다. 본능에 내재된 자연치유법인 것입니다. 살기 위해 곡기를 끊는 것입니다. 곤궁의 상황은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필요한 것과 필요치 않은 것을 구별하게 합니다. 속을 비워내면서 덕지덕지 붙은 세월의 때도 마음에서 털어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의 독서와 복음은 쌍으로 맞물려 있습니다. 1독서 창세기의 이야기가 손상된 인간을 성찰한다면 복음과 2독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치유되고 회복된 인류를 차례로 나란히 보여줍니다. 아주 잘 짜인 말씀의 조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 아담의 죄악과 두 번째 아담의 대속, 손상과 치유, 유혹과 유혹에 대한 승리, 이렇게 말입니다.

먼저 1독서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오늘 봉독된 창세기 2장 이후 사화는 바빌론 유배라는 고난의 시기에 유대민족이 깨달은 세상의 기원과 창조주 하느님을 고백하는 1장보다 더 오래된 문헌입니다. 가나안 정착 이후 이민족과의 끊임없는 전쟁과 패배를 경험하며 유대민족은 자신들의 패배와 절망의 원인을 묻게 됩니다. 위기와 곤궁이 자기를 절박하게 뒤돌아보게 한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의 실패는 어디서 오는가. 왜 이리도 살기 힘든가. 오늘 복음의 원죄 사화는 따라서 당시 유대민족의 인간 내면에 대한 집단적 성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혹되는 존재, 쉬이 손상되는 인간의 나약함이 죄의 본성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깨달음이 평안한 상황에서 펼쳐진 것이 아니라 전쟁과 살육, 참화라는 극한의 곤궁함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단식이 감각을 예민하게 벼리고, 이치를 깨닫도록 맑은 정신을 일으키듯, 극한의 상황은 살기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절박하게 묻도록 합니다. 유대민족은 이 절망의 상황에서 하느님에 불충했던 자신을 깨닫고 이를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뱀의 말에 미혹된 인간이라는 설화적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관건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를 식별하는 것이고 따라야할 진리, 복종해야할 말씀을 귀담아 듣는 것입니다. 실제로 복종이라는 라틴어 obedientia는 ob-audire, 곧 “듣다”에서 유래합니다. 그것도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밑(ob)에서 귀담아 듣는 것이며, 들음(audire) 밑에(ob) 나를 두는 것입니다. 극한 상황에서 이 들음은 눈앞의 것들에 현혹됨 없는 참된 경청이자 맑은 분별을 의미합니다. 살기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만을 식별해내는 눈입니다.

 

예수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정경은 예수의 유년기를 알려주지 않지만 분명 그분도 성장하며 유혹과 곤궁함을 통해 세상을 분별해내고 하느님의 의지를 깨닫는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인류 구원의 첫걸음, 공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 예수가 자처한 광야에서의 40일 단식은 이 과정의 극점이며 하느님의 의지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예수는 하느님을 듣고 그 소리에 복종한 것입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자연스레 유대 민족의 40년 광야 생활을 떠올리게 합니다. 유대백성은 그 광야에서 어떠했습니까. 허기와 갈증으로 모세와 하느님에게 항변했고, 황금송아지에 미혹되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 광야에서 유대백성은 가나안 땅에 진입하기 위해, 즉 살기위해 필요한 단 한 가지는 하느님의 소리를 귀담아 듣고 이에 복종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곤궁한 상황은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분별하게 합니다.

속을 비워내면 머리도 맑아집니다. 곡기를 먹던 시절의 크고 작은 다툼도, 옹졸함도 다 부질 없어 보입니다. 매일 끊임없이 입에 집어넣던 그 많은 음식 중 대부분이 생명과 직결되지 않았던 것임을 새삼 느낍니다. 많은 것을 먹고 많은 것을 걸치고 많은 것을 소유해야 그나마 살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과잉이고 과욕이었음을 깨닫곤 합니다. 특별히, 영양과다 등 끊임없이 소비하느라 무엇 때문에 사는지 알 수 없게 된 오늘날과 같은 ‘문화적 식체’의 상황에서는 이런 깨달음이 매우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첫 인간에게 다가와 건넨 뱀의 화법은 이러한 우리들의 상황과 절묘하게 닮아있습니다. 하느님은 동산의 모든 나무를 허락하고 중심의 나무 두 그루만을 금지합니다. 분명 구속보다 자유가 더 주어진 상황입니다. 그러나 뱀은 자유롭게 주어진 모두를 생략하고 금기된 한 가지만을 부각합니다. 상황과 조건은 변한 게 없지만 전자는 자유에 방점을, 후자는 금기에 방점을 찍습니다. 하나는 부족함 없는 풍요를, 다른 하나는 결핍을 강조합니다. 전자는 필요한 모든 것이 허락된 상황을 묘사한다면 후자는 꼭 필요치 않은 것을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착각하게 합니다. 유혹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 소유하라고 재촉하고 아직 허기지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사실 살기위해서 정작 필요한 것은 단촐한 밥 한 그릇과 물 한잔인데, 많은 것을 소유하게하고 또 그것으로 근심하게 만듭니다. 근심은 또 소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과 독점의 욕망을, 죄를, 그리고 종국에는 생명을 잃게 만듭니다.


복음의 예수에게 다가온 유혹자의 화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혹자가 말하는 근거는 모두 성경입니다. 겉으로는 논리적 결함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적혀있는 대로 말하는듯하지만 저 세치 혀는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을 교묘하게 뒤섞어 놓았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드는 기적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을 먹이시고 기르시는 하느님이 자애로움이 핵심인데 유혹자는 기적과 표징이 마치 하느님을 증명하는 것처럼 호도합니다. 하느님을 졸지에 비범한 능력과 초자연적 힘을 가진 마술사쯤으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맨 마지막 유혹, 곧 세상 전체를 갖게 해주겠다는 유혹자의 꼬드김은 끝을 모른 채 끌어 모으면 세상 전체라도 가질 수 있는 양 행동하는 현대인들의 허영과 영적교만을 많이 닮아있습니다. 당장 내일 아침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는 나약하고 덧없는 존재가 세상을 통째로 집어삼킬 기세로 허세를 떠는 모양이란 참으로 추합니다. 누구나 쉬이 빠지는 유혹입니다.


복음은 본질을 가리는 이 착시와 교만으로 눈이 먼 우리에게 결어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섬긴다는 것은 단순한 굴종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경청, 복종입니다. 살기위해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그리 많지 않으며 난 이로써 이미 풍족하고 자유로우며, 이것으로 충분히 가득하다는 사실의 인정이 곧 진리에 대한 복종, 말씀에 대한 참다운 섬김입니다.


보십시오. 세상을 다 가졌다고 여기던 이들의 종말을. 재벌과 권력자들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세했지만, 사람이 죽어나가도 눈물과 통곡이 범람해도 그렇게 악다구니로 끌어 모아 모두 제 발아래 복속시킨 듯 보였지만 하느님의 정의는 결국 그들의 궁핍을, 그 추한 민낯을 드러내셨습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삶은, 어떤 대단한 신심이나 종교행위가 아닌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진짜 중요한 것을 알고 있는 단출함이고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자 적게 가져도 든든한 자신감이며, 모두들 땅의 낱알을 끌어 모을 때 조용히 다음의 추수를 위해 파종하는 끈기 있는 전망입니다.

우리는 자주 착시에 빠집니다. 사순시기에 권고되는 단식과 절제는 어떤 초자연적 효험이나 영혼 구원을 위한 종교적 행위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적 안정을 위한 정신적 수련의 일종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인 이타행위입니다. 내가 부린 과욕을 덜어내 누군가의 밥 한 그릇을 채우는 소박함, 이 풍요로움이 누군가의 밥 한 그릇을 뺏어온 몫이라는 영적 예민함, 이것이 사순시기 권고되는 절제의 본질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40일간의 이번 여정이 자신을 치유하는 절제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눈을 갖게 되는 분별의 시간이길 기도해봅니다. 또한 기꺼이 누군가를 살리는 따듯한 밥 한 그릇이 되어주는 은총의 때이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