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말씀이 사람되는 길(2015년 8월30일,연중제22주일)
2015년 8월30일(연중제22주일, 마르코 7, 1-23)
식사 전 손을 씻지 않는 제자들로 인해 율법의 규정을 둘러싼 논쟁이 일어나는 것이 오늘 복음의 주요 장면입니다. 식사 전 의당 손을 씻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법으로, 규정으로까지 삼고 있는 유대인들의 이 호들갑스러운 전통은 솔직히 선뜻 이해가 가지를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조금은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 사원, 모스크를 다녀온 후였습니다. 예식을 드리는 본당에 들어가기 전 참례자들은 사원 한편에 마련된 수돗가를 거쳐야합니다. 손과 발, 귀와 코, 눈을 매우 익숙하고 절제된 동작으로 닦습니다. 한 움큼의 물로 통일된 동작으로 씻는 모습은 경건해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마다 일하는 현장이 다르고 사원으로 오기 전 거쳤던 장소가 달라 씻는 속도와 꼼꼼함은 다를 수밖에 없을 텐데 모두 같은 동작, 같은 횟수, 같은 속도였습니다. 이 통일된 단순함은 씻는 행위가 예식화 되었음을 의미입니다. 씻는 행위는 단순히 씻는 행위를 넘어 규격화된 형식을 빌어 예배의 일부가 된 것입니다. 위생을 위한 인간의 습관이 종교성을 획득한 것입니다. 몸을 씻는 것은 이제 단순한 위생 습관이 아닌 신 앞에 서기위한 정화의 행위인 것입니다.
무슬림들의 이러한 습관은 오늘 복음에서 논쟁으로까지 비화한 유대인들의 관습에서도 찾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슬람교, 유대교 모두 건조한 사막 지방에서 발원한 종교입니다. 모래 먼지를 털어내고 몸을 되도록 자주 씻어야하는 것은 사막 지방에서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위생 상식입니다. 더욱이 유대민족은 이집트를 탈출해 가나안 땅에 이르는 오랜 여정 동안 집단생활이 불가피했기에 전염병 등의 예방을 위해서는 철저한 위생관리가 필수적이었습니다. 개인의 위생은 집단의 생존에 직결된 문제였습니다. 이 생존을 위한 인간집단의 관습은 세월이 흐르면서 규격화되었고, 단순히 살기위한 위생 습관을 넘어 예식과 규정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왜 씻어야하는지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던 이들에게는 이 규정은 살아있는 규정이었지만, 세월이 한참 흐른 후의 이들에게는 '왜'를 묻기 전에, 규격화된 행위, 예식과 전례의 준수 그 자체가 더 중요하게 됩니다. 규정이 생겨난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규정은 생존과 직결된, ‘함께 살기위한 약속'이었다면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살기 위함"이라는 원초의 기억은 온데간데없이 예식이라는 허울만 남은 종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가나안 땅을 향해 길을 가던 선조들에게 하느님의 법은 인간 자신을 위한 법과 일치했지만,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법은 인간 자신이 아닌 하느님을 위한 법으로만 남게 된 것입니다. 선조들의 종교는 나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실체감 있고 실제적인 구원의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었다면, 후대의 종교는 징벌을 피하고 죽지않기위해 지켜야할 규정과 법규만 가득한 예식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선조의 종교가 구원과 해방을 위한 인간의 법이었다면, 후대의 종교는 규정으로 인간을 속박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앙상한 종교라는 틀로 전락한 것입니다. 선조의 하느님이 자유와 삶을 위한 하느님이었다면, 후대의 하느님은 징벌과 심판의 하느님이며, 선조의 믿음이 적극적인 신앙이라면, 후대의 믿음은 소극적 규정준수에 불과합니다. 완벽한 도치, 주객의 전도입니다.
1독서의 신명기는 바빌론 유배 때 저술된 책입니다. 가나안 땅 정착을 위한 여정 중의 이스라엘에게 모세를 통해 내리는 하느님의 법을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 탈출기의 체험이 한참 지난 후에 과거를 떠올리며 회고적 문체로 기술된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명기는 이미 사막의 여정을 완수한 민족이 광야에서 느끼던 참으로 살아있는 하느님, 자신들을 실제로 해방과 자유, 구원의 땅으로 이끈 실제적인 하느님을 잊은 채 규정과 법규의 앙상한 예식만을 손에 쥔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참회의 고백인 것입니다. 쉐마 이스라엘! 들어라 이스라엘아. 이 한마디는 그 옛날 억센 팔로 우리를 노예살이에서 해방한 하느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저마다 머리에 이고 다니는 성구갑 속의 구절은 바로 이 신명기의 쉐마 이스라엘, 곧 너의 하느님을 기억하라는 문구입니다. 조국의 멸망 후 2000년 이상을 세상에 흩어져 살았던, '이방인들 사이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했던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잊지 않고 살아남은 비책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억하라! 너희들은 어디서 왔고 또 너희들을 오늘에 있게 한 하느님을, 이집트에서 구출해낸 살아있는 하느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전례의 구성은 단순한 배열이 아닙니다. 그 구성을 보고 있노라면 교회 공동체가 유구한 시간을 통해 하느님이 인간에게 전하고자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더 효과적으로 드러낼까 고심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통상 1독서는 구약의 이야기입니다. 원체험, 곧 하느님을 알아본 이스라엘 백성, 믿음의 발원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반면 복음은 그 원체험의 기억이 희미해진 오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규정의 본 목적은 사라진 채 규정과 법규라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가난한 오늘에 대한 성찰입니다. 그래서 가끔 예수의 질책은 날선 칼날처럼 매섭습니다. 쇄신과 정화의 명약은 쓰기 마련입니다. 복음은 따라서 비단 예수의 시대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서 왔고 또 어떤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는지가 희미해진 오늘의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현재적 말씀입니다. 반면 제2독서는 잊어버린 하느님을 다시금 기억하게 만들어준 예수 이후, 홍해를 가르고 만나를 먹이고 광야에서 물을 샘솟게 했던 하느님도, 눈먼 이를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죽은 이를 살리던 예수도 모두 떠나고 사라진, "하느님 부재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에 대한 친절한 가르침입니다.
오늘 1독서가 살기위한 규정을 선포했다면, 복음은 살기 위함이라는 본 목적은 사라진 채 규정만 남은 가난한 오늘에 대한 예수님의 각성입니다. 2독서는 그 모두를 아우르는 종합입니다. "말씀에는 여러분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은 무엇입니까? 공기의 파장으로 귓가를 진동해 전달되는 말. 그렇다고 모든 소리가 말은 아닙니다. 의미로 전달되어야 말입니다. 말에 구원할 힘이 있다는 말은 귓가를 진동해 들어오는 소리의 파장 그 자체가 아니라 진동을 통해 전달되는 소리가 의미를 획득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곧 소리가 지시하는 내용들, 이야기들, 이유들이 있는 법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연인끼리 주고받는 말은 단순한 소리를 넘어 그를 이해하고, 그를 포용하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 그를 위해 살고 싶다는 벅찬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말의 힘입니다. 말씀, 곧 하느님의 법, 하느님의 계명의 진정한 이해는 귓가를 진동해 들어오는 소리를 해독하는 것을 넘어, 실제로 몸이 반응하는 것을 뜻합니다. "너를 사랑해"라는 말이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는 순간은 단순한 이해를 넘어, 사랑을 고백한 사람을 향해 마음이 열리고 뜨거움이 차오르는 때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말씀의 육화'는 몸소 인간의 몸을 빌어 인간이 된 신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말들이 공기의 파장과 귓가의 진동을 넘어 실로 듣는 이의 마음을 흔들고 그 안에 깃드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말씀의 육화입니다. 듣기만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듣기만하고 동요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공을 떠다니는 온갖 소음의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는 묵주신공과 같은 염경기도를 열심히 합니다. 그 기도가 신공, 곧 공덕이 되기 위해서는 반복해서 읊조리는 기도문의 내용들을 이해하고 그렇게 살 때 가능합니다. 반복해 읊조리는 그 소리 자체가 아니라 기도문이 품고 있는 이 땅에 실현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신뢰, 나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 참으로 복된 나를 발견할 때, 기도는 비로소 공덕이 됩니다. 말씀이 진짜 사람이 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전례와 같은 규격화된 종교 예식은 참례자들을 진정한 예배를 위해 준비시키고, 경건하게하며 불필요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게 합니다. 인간 예식의 긍정적 측면입니다. 하지만 예식이 예식을 위한 것이 되면 그것만큼 공허하고 지루한 일은 없습니다. 온갖 기도와 정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는 행위 자체는 아무것도 바꿀 힘이 없습니다. 아직 그 자체로는 무력합니다. 기도가 전하는 메시지를 '품어야' 기도는 위력을 발휘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이 엄청난 메시지를 내가 실로 이해하고, 몸소 살며,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때 기도는 비로소 힘을 얻게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잡음,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헛말일 뿐입니다. 예식과 기도, 그 자체에만 집착하거나, 예식과 기도가 발원한 그 자리를 잊는다면, 그것은 물신화에 불과합니다. 부적 자체가 영험함을 지녔다고 믿는 어리석은 믿음에 다름 아닙니다. 예식과 기도는 구원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지 결코 구원은 아닙니다. 구원은 예식과 기도가 생겨난 자리, 실로 인간을 살리고 인간을 구원한 하느님에 대한 기억을, 저 고래의 기억을 오늘의 나의 기억으로 재현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명과 사람의 전통이 일치하던 저 태곳적 시대는 끝났습니다. 유구한 세월은 결국 인간의 전통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하느님의 계명이었다는 태초의 기억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쉐마 이스라엘! 들어라 이스라엘아! 우리에게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잊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나의 기도는, 나의 믿음은 저 신랄한 예수의 말 앞에 얼마나 당당합니까. 얼마나 떳떳합니까.
영성체 후 묵상 후
주님의 기도처럼 자동 반사적으로 나오는 기도들이 많습니다. 그 뜻을 미처 헤아리기도 전에 입에서 순식간에 빠져나오는 기도들. 그런데 그 뜻을 펼쳐 헤아리다보면 엄청난 내용들을 내가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는 대목이나,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대목에서는 자주 부끄러워지고 또 벅차오기도 합니다. 아, 이 엄청난 내용을 내가 기도하고 있구나싶어 무의식으로 읊조렸던 내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질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난 아무것도 한 것이 없구나싶어 공연히 미안해집니다. 기도 속에 '혁명'을 새겨두었는데 나는 히마리 없는 글자들만 중얼거렸구나 싶습니다. 부요한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고, 주린 이를 먹을 것으로 채우고, 눈먼 이들에게 빛을, 갇힌 이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을 향한 성모 찬가, 마니피캇을 매일 저녁 기도하면서도 저 옛날 작은 체구의 마리아가 품었던 마음에 비하면 형편없이 볼품없는 나의 현실에 대한 체념들에 부끄러워집니다. 저 작은 소녀도 이런 엄청난 것을 꿈꾸었고 그것을 위해 자신을 소진했는데 나는 무엇이 두려워 이렇게 주저앉아있나 싶어 낭패감이 들기도 합니다. 나의 기도는 나를 위한 기도만이 아님을 이렇게 반복해 습관처럼 드리는 기도들 속에서 발견하곤 합니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쫓겨난 이들, 고공에서 인간적인 대접을 위해 외치는 이들, 여전히 상처가 아물지 못한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 또 그들과 함께 세상의 고통을 함께 울고 함께 밤을 지새우는 이들이, 매일 기도하지만 맥없는 맹탕의 마음으로 사는 나보다 곱절은 더 신앙인으로 보이는 까닭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말씀이 실로 이 땅에 우리들 사이에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하느님의 인간되심은 엄청난 무엇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가냘픈 시골 소녀의 '예' 한마디였습니다. 그 작은 '예'가 육화를 이끌어낸 힘입니다. 그 예가 진짜 기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기도는 입이 아니라 몸으로, 나의 수고로, 내 하루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거듭된 아기 예수의 탄생인 것입니다. 말씀의 육화의 마지막 통로, 우리들의 기도를 축복하고 응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