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다 (강론)

치유의 완성 (2015년 2월 15일 연중 6주일)

바깥 주인장 2015. 2. 19. 20:58

2015년 2월 15일

연중 6주일

마르코 1,40-45

프랑스 남부 리옹에서 멀지 않은 아르스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마을 초입에는 양을 데리고 있는 한 소년과 대화를 나누는 사제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아르스의 성자 마리 비안네 신부입니다. 부임 받은 본당으로 가는 낯선 길을 목동에게 물었다는 성인의 일화는 유명합니다. "내게 아르스 본당 가는 길을 알려주렴.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 가는 길을 알려주마" 부임 후 죽을 때까지 일했다는 아르스 본당에는 지금도 비안네 신부가 귀를 쫑긋 세우고 사람들의 죄를 듣던 나무로 만든 고해소가 있습니다. 손때와 죄인들의 무릎으로 닳고 닳아 틀어진 낡은 나무 장괴틀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쏟아 낸 죄의 무게 같습니다. 워낙에 머리가 나빠 유급을 면치 못하던 사제는 죽을 때까지 한 본당에서 일과의 대부분을 고해소에서 인간들의 죄만을 들었습니다. 그가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이라는 사실은 시사 하는바가 큽니다. 능력 없던 사제는 그렇게 좁고 답답한 공간에서 사람들을 경청하고 사람들을 위로하고 사람들을 치유했던 것입니다. 괜찮은 학벌이나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는 결코 참을 수 없는 좁은 공간과 보잘 것 없는 소임입니다. 능력 없음이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는 능력인 셈입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이 능력 없는 사제가 죄인들의 벗이자 탁월한 경청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이 "능력 없음"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낫길 원하는 문둥병자의 청으로부터 시작되는 치유의 기적을 그리고 있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나환자가 가진 확신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가 답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기적의 단초는 죄인의 치유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당신은 마음만 먹으면 나를 낫게 할 수 있다는 확신과 다급한 와중에 여기저기 보내는 구난신호는 분명히 구별됩니다. 전자는 상대방에 대한 믿음과 치유에 대한 자기 확신이라면 후자는 아니면 말고 기왕이면 다행인 수 만개 가닥의 지푸라기 같은 신호입니다. 전자가 자신 앞에 놓인 이를 강을 건너기 위한 '유일한' 징검다리로 바라보았다면, 후자는 상대를 산자락을 오르기 위한 여러 개의 경로 중 하나로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치유는 낫고자하는 자기 확신에서 시작됩니다. 때문에 여기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라는 예수의 말은 "너가 원하니"로 고쳐 읽혀질 수 있습니다.

 

비안네가 죄인들의 벗으로 치유의 아버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그 앞에 다가온 아르스 촌구석의 무지랭이 죄인들의 확신이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고해소에서 일어났던 위로와 치유는 비안네만의 작품이 아닌 죄인과 고해신부의, 곧 "공동 치유자"들의 작품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는 상처를 입어 상처 입은 자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혜안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처 입은 자신이 스스로에게 치유자일 수 있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치유는 낫고자하는 자기 확신과 병들었음에 대한 자각, 곧 죄의 식별에서 시작됩니다. 고해의 순간보다 고해실에 들어오기까지 고뇌하고 번민하는 성찰의 시간에 더욱 분명한 고해성사의 은총을 감지할 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문제를 깨닫는 자는 답도 이미 알고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죄인인 동시에 치유자입니다.

 

고해실에 앉아 있다 보면 죄는 하나같이 혼자 일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거의 대부분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아가야하는 세상살이의 고단함 때문이거나, 고립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죄는 혼자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상처를 입었다면 상처를 준 이가 있는 법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호호 할머니들이 젊은 신부에게 입버릇처럼 하시는 "사는게 죄죠"라는 죄 같지 않은 죄는 우리들 모두가 읊조리는 공통의 죄인 셈입니다. 죄는 관계의 파괴, 곧 고립과 격리를 의미합니다. 예수 시대, 모든 질병은 죄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겼고, 질병을 앓는 이는 곧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었습니다. 더 이상 더불어 살수 없음! 징벌입니다. 살아있지만 살아있다 말할 수 없는 참혹한 삶입니다. 그런 무덤 같은 삶에 등장한 예수는 그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치유자인 동시에 해방자입니다. 몸의 병을 낫게 하는 동시에 자신이 갇혀있던 죄의 창살을 부수고 다시금 "무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준 해방자인 것입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이를 신화적 상징으로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죄로 추방된 광야는 하느님으로부터의 격리,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에덴에서의 하느님과의 지복직관을 잃어버린 광야의 삶은 끝도 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대지이지만 한 평 남짓한 감옥보다 좁습니다. 외롭고 고단합니다. 이렇게 파괴된 인간을 회복시키는 두 번째 아담, 예수는 그런 의미에서 단절된 하느님과의 관계를 복원하는 치유자이자 하느님으로부터 격리된 죄의 담벼락을 무너트린 일대 해방자인 것입니다.

 

다시 아르스의 비안네로 돌아가 봅니다. 비안네가 태어난 시기는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 교회가 모조리 무너진 때입니다. 그리고 그가 사제품을 받고 본당 신부로 부임할 즈음은 교회의 모퉁잇돌만 남아있는 폐허의 시기입니다. 돌로 지은 크고 웅장한 교회들은 여전히 건재했지만 사람들은 신앙에 무지했고 믿음은 의미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교황청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교황청의 해산, 열강들의 헤게모니 싸움만으로도 힘에 겨울 때였습니다. 가난한 촌로들에게 사는 것은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았고 매일 땅을 부쳐 먹어야 하는 일상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호사로운 관심사였고, 성경이나 사제들의 강론은 살롱 여인들의 담화처럼 감자 한 톨 보다 못한 쓸모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아팠고 고단했고 무의미했습니다. 옛 성인전들은 비안네의 비범한 모습을 애써 그리려하지만 저는 가만히 눈을 감아봅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살아가야하니 살아가는 무지한 촌로들 앞에 다가간 젊은 사제의 당혹감, 그들을 만나기 위해 온종일 흙을 묻히는 밭으로 달려가 한참을 이야기를 건넸을 간절함, 번듯한 외모도, 괜찮은 학식도 없는 못나고 무능력한 신부로 사제관 차가운 침대위에서 고뇌했을 하얀 밤들. 훗날 치유자로 기억되는 그 역시 그 순간 고립되고 무리로부터 격리된 애처로운 죄인일 뿐입니다. 다시 눈을 감아봅니다. 고해실에서 주고받은 소소한 일상 이야기, 죄라 말하기도 민망한 고단한 삶으로 범벅된 농부들의 넋두리, 듣다가 덩달아 어쩔 수 없이 마음으로 같이 울게 되는 선한 이들에게만 쏟아지는 것 같은 모질고 야속한 불행들. 그렇게 비안네는 작고 사방이 막힌 고해실에서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회복하고, 하느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죄를 듣기위해 스스로 격리된 공간에서 오히려 그는 해방되고 회복되고 치유된 것입니다. 그 앞에 솔직히 자신을 쏟아내는 순박한 농심으로 비안네는 능력 없는 사제에서 권능의 사제로 거듭난 것입니다. 치유자는 그렇게 상처받은 이들 가운데서 완성됩니다.

 

온갖 것들이 우리를 고립시키고 격리시키고 무리로부터 떨어지게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하느님으로부터 관계로부터. 하지만 자신이 고립되었음을 느끼는 사람은 적습니다. 아니 안다고 해도 자신이 그런 처지라는 것을 드러내기 두렵습니다. 살짝 꺼내보일라치면 맹수가 목을 잡아채는 험악한 세상이라 그렇습니다. 하지만 꺼내야합니다. 아파야 합니다. 아프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야 치유자가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야 낫습니다. 죄는 혼자 일어나지 않습니다. 치유 역시 혼자 하는 일이 아닙니다. 관계를 회복하려는 마음, 두 동강난 세상과 자신을 다시 꿰매어 이으려는 마음, 추방된 에덴을 그리워하는 마음만이 그를 낫게 합니다. 그때 치유자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치유의 완성은 치유자로 거듭남입니다. 갇힌 이, 눈먼 이, 배고픈 이, 상처 입은 이에게 기꺼이 나를 내어줄 때 치유가 완성됩니다. 그들은 아무 상관없는 이들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격리되고 사람으로부터 고립된 내가 "기필코 다시 돌아가야 할 무리"입니다. 고립무원, 고고한 고독한 삶은 치유의 책에는 없습니다. 이 무리가 나를 살리고 죄에서 해방하고 병을 낫게 합니다. 예수가 먼 길을 마다않고 죄인과 병자들을 찾아간 이유입니다. 수많은 성인들이 시대의 아픔과 가난한 이들의 행렬에 동참했던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