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상관있는 하느님 (2013. 10. 17 대한문 쌍용자동차 분향소 앞 매일미사 193일재)
대한문 쌍용자동차 희생자 분향소 앞 매일미사 193일째 강론
2013년 10월 17일
로마서 3, 21-30: 루카 11, 47-54
학교 사정상 밖에서 자취생활을 하는 제 집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물론 기다리는 손님은 없습니다. 신문 구독하라고, 마트에 좋은 물건 나왔다고, 택배 왔다고, 예수 믿으라고 찾아오는 손님들 정도입니다. 어느 날 찾아온 예수 믿으라는 손님은 그냥 가라는 제게 한사코 물 한잔이라도 달라 졸라대서 지금 절 다닌다고 말하고 간신히 돌려보냈습니다. 아쉬운 듯 가방에서 주섬주섬 팸플릿을 챙기더니 제 손에 쥐어줬습니다. 두고 간 홍보물을 찬찬히 봤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방법을 적어놨습니다. 귀가 솔깃해집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명예나 돈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행도 아니랍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 말합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오직 믿음이라는 말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묻어있는지는 설명하질 않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바로 마틴 루터의 의화(Justificatio) 교리의 뿌리인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루터에 의하면 인간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과 믿음으로 의로움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루터에게 그 의로움은 참으로 죄 없는 무죄함이 아닌 범한 죄와는 상관없이 나를 그저 ‘의롭게 여겨주는’ 하느님을 강조합니다. 범한 죄를 은총에 의해서 씻김 받는 것이 아니라, 죄는 남은 채 하느님이 나를 그저 ‘의롭게 여겨준다’는 의미입니다. 곧 용서와 은총이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달려있음을, 모든 주도권은 하느님이 쥐고 있음을 강조한 말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철저하게 나약한 인간, 때문에 하느님의 선하심만이 이 흠결의 인간, 죄의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곧 인간이 가져야할 하느님 앞의 겸손과 자기성찰 그리고 하느님에게 전적으로 의탁하는 자세를 가르칩니다. 이러한 맥락이 무시되고 잘려나가니 남는 것은 ‘믿음’이라는 모호한 말입니다. 어떤 믿음이란 말입니까!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루터의 이러한 의화 교리는 인간의 노력과 자유의지를 높이 사는 가톨릭과 교의적 격론을 초래했고 결국 정치적 상황 등을 제외한 상태의 원리적 측면에서 두 교회가 갈라지는 결정적 원인이 됩니다. 말 그대로 원리적 측면의 이해만 남으니 그 교리가 생겨난 자리, 그 역사와 맥락이 사라졌고 결국 그 참뜻은 모호해졌습니다. 역사의 물줄기는 참 얄궂습니다. 루터와 바오로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본디 다른 것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둘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화려한 예식이나 철저한 규범 준수가 구원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거듭난 삶’이라는 것이었는데 이야기는 영 다른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바오로와 루터가 이야기한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에 대한 질문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는 이의 구미에 맞게 이합집산과 선택만이 남았습니다. 제 상황에 걸맞게 가톨릭 영주가 다스리는 곳으로 이주하거나 프로테스탄트 영주가 다스리는 곳으로 이주했습니다. 영주들 역시 제 상황에 맞게 프로테스탄트를 자처하거나 가톨릭의 수호자처럼 행세했습니다. 내용은 없고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의미는 없고 결과만 남았습니다. 십자가는 없고 십자모양의 형틀만 남았습니다. 하느님은 없고 제사만 남았습니다. 고백은 없고 믿는다는 행위만 남았습니다. 이젠 아무도 그 진짜 내용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20세기, 양차대전을 겪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례 없는 참상 앞에 이런 비극을 허락할 신은 없다고 몸서리치던 이들은 묻습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그 중 죌레(D. Soelle)라는 독일여성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저 구름 속 어딘가에 신이라 부르는 초월자가 있다 치자. 그런데 나와는 상관없다. 내게 그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가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참으로 발칙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신 존재의 부정이 아니라 내 시간과 삶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그런 신은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인 ‘무의미’란 의미입니다. 그녀는 고상한 수식어로 가득한 신학책이 아니라 오직 내 삶과 시간을 관통하는 실존적 하느님, ‘나와 상관있는 하느님’을 원했던 것입니다. 나와 상관있는 하느님 말입니다. 나로 인해 정말 죽고, 그로 인해 내가 마음 설레고, 그 때문에 죽을 각오를 하는 그런 ‘나와 상관있는 하느님’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믿음은 다름 아닌 이와 같은 실존적 믿음입니다. 좀 더 그리스도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전인적 신앙’인 것입니다. 머리만이 아니라 몸으로, 말이 아니라 삶으로 고백되는 신앙입니다. 관념으로 초월자가 있음을 믿는, 곧 '존재의 인정'이 아닌 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유일무이한 관계로 얽혀있는 실존에 대한 고백입니다. 때문에 나의 삶과 역사를 휘어잡는 하느님은 율법에 온전히 담겨질 수 없을뿐더러 인간의 제사가 모두 품을 수 없는 분입니다. 다만 이 하느님은 그를 따르는 삶(sequela Christi), 곧 그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동화의 삶, 의화(justificatio)된 삶, 말씀이 체화된 삶, 하느님처럼 된, 곧 신화(deificatio)의 삶에서만 찾아지는 하느님입니다. 곧 바오로가 고백하는 하느님입니다. 바오로는 이러한 전인적 믿음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죽고 이제 그리스도가 산다”
오늘 복음은 두 부류의 인간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율법학자요 다른 하나는 예언자입니다. 율법학자는 누구입니까. 복음의 말마디를 옮기자면 그들은 지식을 틀어쥐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들마저 못 들어가게 가로막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을 법전위에 어지럽게 적혀있는 단어들에 가두고, 하느님을 시간도 공간도 없는 역사 없는 진공에 가두고, 하느님을 앞뒤 전후 인간의 애환 없는, 서사 없는 허깨비로 만듭니다. 나와 상관있는 것은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아니고 글자가 정해놓은 규칙과 규범입니다. 이 하느님은 표정도, 감정도, 연민도, 정념도, 인격도, 역사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십자모양의 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언자는 누구입니까? 예언자의 피울음은 시대의 피울음입니다. 그의 눈물은 시대의 눈물이며 백성들의 고난입니다. 그가 쏟아낸 말은 법전에서 주워 담은 낱말들이 아니라 들에서, 골목길에서, 광장에서 길어 올린 희로애락, 생로병사의 사람들입니다. 그가 고백하는 하느님은 밤잠을 깨워 자신의 이름을 수도 없이 불러주는 귀찮은 존재이고(사무엘), 다시는 주님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말자 결심해도 결국에는 손을 들게 만드는(예레미아) 집요하며 끈덕진 존재입니다. 그가 하느님을 발견하는 장소는 고요한 정적이 아니라 모래 바람이 자욱하게 올라와 사위가 구분되지 않는 혼돈 속이며, 고함 소리가 가득해 귀가 윙윙거리는 장터입니다. 그는 그 속에서 하느님을 알아봅니다.
율법학자의 충실함이 법전의 글자에 대한 것이라면, 예언자의 충실함은 인간 눈물 속의 ‘말씀’입니다. 율법학자의 믿음이 “믿는다”를 발음하는 그 행위자체라면, 예언자의 믿음은 각혈과 같은 온몸의 고백입니다. 율법학자의 하느님이 구미에 따라 취사선택이 가능한 존재라면 예언자의 하느님은 벗어날 수도 또 뿌리칠 수도 없는 나를 온전히 사로잡은 실존입니다. 율법학자의 믿음이 사람도 눈물도 없는 빈껍데기 ‘교조’라면 예언자의 믿음은 인간으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나는 ‘역사’입니다.
하느님을 자꾸 앞뒤 맥락을 잘라버린 토막짜리 격언으로 만드는 세상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책속에, 고요한 경당에, 피정집 뒷동산의 평화, 무념무상의 ‘격언’으로 있으라 종용하는 세상입니다. 토스트예프스키가 말하듯 재림한 예수를 뒷골목에 끌고가 ‘조용히 떠나시오’라고 겁박하던 대주교와 같은 세상입니다.
복음은 예언자의 피울음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때문에 울고 하느님 때문에 구원을 알리려 저주받은 인간들의 도시를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무모함입니다. 어느 때든 내 삶의 자리를 털고 다른 주인에게 깃들 수 있는 선택이 아니라 그에게 온전히 사로잡힌 '포로'의 삶, '헌신'의 삶, '투신'의 삶입니다.
근래 어떤 믿는 이들은 후미진 곳을 외면 못해 달려가고 곡소리 나는 자리를 함께 울어주려 발걸음을 종종거리는 또 다른 믿는 이들을 훈계하고 나무랍니다. 제가 지닌 권력을 위해, 권세를 수호하기위해 ‘하느님’을 수호하고 ‘믿음’을 수호한다 말합니다. 똑같은 하느님인데 아이러니합니다. 그러나 그런 하느님은 없습니다. 있다 해도 그런 하느님은 나와는 ‘상관없는’ 하느님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예언자의 눈물 같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실존적 단순함을 기억합시다. 복음은 에둘러가지도 않고 선택할 여지를 두지 않습니다. 곧장 나를 향해 육박하는 그 말씀을 담을 그릇은 규율도 규범도 화려한 예식도 아닙니다. 그 그릇은 오직 내 삶, 내 역사, 내 실존입니다. 각혈 같은 고백, 운명 같은 사랑입니다.
세상이 만신창이입니다. 삶은 없고 ‘교조’만 남았습니다. 눈물은 없고 ‘운동’만 남았습니다. 인간은 없고 ‘정치’만 남았습니다. 서사는 없고 ‘격언 ’만 즐비합니다. 내가 고백하고 사랑해마지 않는 십자가는 없고 십자가 모양의 형틀만 남았습니다.
이곳 대한문의 193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을 회복하고 눈물을 나눈 시간입니다. 잃어버린 인간을 다시 찾고 빼앗긴 서사와 역사를 복원하는 시간입니다. 손수 십자나무를 곱게 깎아 진짜 구세주를 정성으로 모시는 시간입니다. 복음에 설레고 복음에 울고 복음으로 밤잠을 설치는 인간의 자리, 하느님 닮은 인간의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