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다 (강론)

'하강下降'. 육화와 하느님의 자기부정(kenosis) (2013. 8.22. 노틀담 수녀회 첫 서원미사 강론)

바깥 주인장 2013. 8. 24. 00:07

2013년 8월 22일

노틀담 수녀회 첫 서원 미사

필립비 2장 6절-11절. 마태오 3장 13절-17절

 

필립비 2장 6절, 마태오 3장 13절. 서원자들이 직접 고른 독서와 복음입니다. 이 성서구절을 받아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이 말씀이 지닌 삶의 엄중함을 과연 서원자들은 알기는 하는 걸까라는 어설픈 노파심이었고 둘째는 이 말씀이 수도생활, 나아가 믿는 이들이 구원에 이르는 참된 좁은 길이라는 사실을 초심자들이 벌써 알아챈 것 같다는 열등감과 행복감이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오늘의 약속은 곧 고난의 길이며 육화의 길, 단 하나, 지상에서 하늘로 올곧게 연결된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벌써 깨달은 완숙함에 대한 질투의 마음일 것입니다.

 

세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예수는 강가로 ‘내려갔고’ 몸을 숙여야 했습니다. ‘하강下降’의 동작들입니다. 오늘 읽혀진 독서 말씀을 관통하는 단어 역시 ‘낮추다’입니다. 육화의 신비는 다름 아닌 하느님의 ‘자기 낮춤’ 곧 자신의 초월을 유한으로, 영원을 시간으로, 전능을 유약함으로, 불멸을 죽음으로 맞바꾼 하느님식 엉터리 셈법입니다. 완벽한 자기 비움, 하느님의 자기 낮춤은 곧 하느님의 자기부정(kenosis)입니다.

시편저자는 이 하느님의 자기부정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 노래는 ‘내려가는 모든 자들’, ‘자신을 부정하고 부정당하는 모든 이들’의 노래이기도합니다. “내가 이르건 데 너희는 신들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다. 그러나 너희는 사람들처럼 죽으리라. 여느 대관들처럼 쓰러지리라.” (시편 81)

 

믿는 이들의 최종목표는 ‘신화’입니다. 곧 하느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발칙하고 위험한 상상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고매해지거나 격있는 품새를 갖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호령하거나 깃발을 펄럭이며 맨 앞에 서는 선두의 길도 아닙니다. 신화, ‘하느님 됨’의 올바른 열쇠 말은 ‘육화’인 것입니다. 육화의 신비에 대한 올바른 해석학은 또한 자기 비움, 곧 자기 부정입니다. 하나도 멋스럽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요 볼품없고 나아가 곤혹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그 곤혹스러운 자기 부정에는 어떻게 가 닿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다분히 ‘피동’적 입니다. 곧 ‘복음의 순결성’을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좌도 우도, 효율도 능률도, 진보도 보수도, 신념도 이데올로기도, 보호도 치장도 없는 순수한 복음의 결정체를 내 안에 품는 것입니다. 기꺼이 나를 비워내고 씻어내고 오롯이 순결한 복음만을 끌어안는 삶을 의미합니다. 정념도 이념도, 옳음도 그릇됨도 없는 순결의 지평선, 곧 하느님 말씀으로 살고 복음으로 길을 찾으며 마지막에는 복음의 대가로 목숨을 내놓겠다는 무겁고도 고된 길에 대한 고백입니다. 복음에 온전히 나를 맡기는 운명론자의 길입니다.

 

제 말도 이제 땅으로 내려올까 합니다. 관념의 말만 무성히 늘어놓다 끝나면 이것 역시 이율배반이니 말입니다.

오늘 저는 초심자들이 묵상해온 이 복음 구절을 읽으며 단박에 한 인물을 떠올렸습니다.

오스카 로메로. 너나 할 것 없이 그럴듯한 경력을 쌓는 시절입니다. 인정받는 삶, 괜찮은 이력을 갖추고 싶은 것은 과거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세속에도 그리고 교회에서도, 그야말로 시대와 성속 구별 없는 인간의 기초적 욕망입니다. 로메로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군부의 독재로 어디론가 소리 없이 끌려가는 생명들이 있어도 책의 고요를 사랑했고 성체 앞의 고독을 즐기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비난 받을 일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했고 교회를 아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평화라기보다는 그저 고요를 사랑한 삶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주교라는 품위에 올랐습니다. 권력자들이 찾아왔고 더러는 서로의 안녕을 기원한다며 다시금 전과 같은 고요와 고상함 안에 머무르라 충고했습니다. 그런 그가 변합니다. 사람들을 만났고 벗들의 눈물을 맛보았고 세상 고통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가난과 억압, 인간의 잔인함을 온몸으로 체험한 그는 그 모든 것 곁에 있기를 기꺼이 원했습니다. 폭력에 희생되는 엘살바도르 사람들의 애환을 자신의 애환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의 눈물에 자신을 담아 그들과 함께 아니 ‘그들이 되어’ 주르륵 흘렀습니다. 눈물처럼 그렇게 끊임없이 내려가 결국 목숨까지 내려놓았습니다. 20세기의 순교자, 20세기의 '육화 사건'입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의 변화입니다. 그것도 앞뒤를 뒤집은 동전 같은 일순간의 극적인 변화 말입니다. 고요가 광장의 소란으로, 책속의 낱말들이 사람들의 눈물로, 안락한 고요가 폭풍 같은 격정으로 바뀐 연유가 궁금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가 이미 자신의 오장육부 모두를 들어내고, 그 자리에 오롯이 복음의 결정체, 신앙의 정수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순결함은 연약합니다. 때도 묻고 무지하며 때로는 무모합니다. 순결하기에 물들기 쉽습니다. 순결하기에 또한 거역하기 힘듭니다. 복음의 정언, 그리스도의 명령에 그저 순명, 곧 자신의 순결을 바칠 뿐입니다. 당신이 내 안에서 나로서 사소서!

때문에 로메로 주교의 극적 변화는 드라마틱하기보다는 운명적입니다. 이미 자기를 온전히 비운 후, 복음의 다른 말, 곧 세상의 고통을 하느님의 고통으로 알아듣고 이에 기꺼이 응답했던 것입니다. 좌도 우도, 진보도 보수도, 이념도 전략도 없는 그저 복음의 길을 걸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순결함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치기어린 의협심도, 칭찬받고 싶음 미숙한 마음도, 그리고 선의 진영에 속해있다는 안도감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신을 비워낸 자리에 들어선 예수의 소리를 세상을 통해 귀여겨듣고 응답했을 뿐입니다. 그것도 온몸으로 말입니다. 백치에 가까운 순결, 눈먼 사랑에 가까운 순수입니다.

 

오늘 가난, 순명, 정결을 서원하는 초심자들의 길은 다름 아닌 자기부정의 길입니다. 스승 예수가 걸어온 길, 하느님이 몸소 보여준 육화의 길입니다. 모두, 온전히 내려감을 통해 완성되고 고양되는 길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의 무저갱을 내려가야 다시 빛을 볼 수 있는 가혹하고 엄중한 길입니다. 저 역시, 그리고 많은 선배 수도자들 역시 그 갱도 입구의 언저리를 아직도 서성이거나 또는 그 무저갱을 무작정 내려가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그 끝에 무언가 우리를 위해 준비된 선물을 기다리는 마음도 아닙니다. 그저 오늘을 억척스레 복음으로 살아가는 하루살이와 같은 삶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하루살이, 복음의 하루살이 말입니다. 이제는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희망’할 뿐인 길고도 굽은 길입니다. 의혹의 시간도 엄습할 것입니다. 기쁨과 성취도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나를 지켜줄 것은 또 내가 지켜야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순결함입니다. 그 길만이 우리를 채워주고 높여주며 완성합니다.

 

수도생활의 의무는 하늘나라의 예시입니다. 희망을 미리 내 삶 안으로 끌어들아고 부활을 내 하루에 품는 것입니다. 부활과 희망의 선취가 곧 나의 하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오롯이 ‘내려가야’ 가능한 일입니다. 땅으로, 사람으로, 그리고 세상의 고통으로 ‘육화’해야 이룰 하루입니다.

이제 계획하지 마십시오. 오직 복음으로 설레고, 복음으로 눈물짓고, 복음으로 아파하고, 복음으로 앓고, 복음으로 밤잠을 설치십시오. 그리고 복음에 순종하고 복음으로 희망하십시오. 아니 스스로 복음(끼쁜소식)이 되십시오.

복음의 운명에 순결을 봉헌한 로메로 주교의 기도를 끝으로 오늘 강론을 마칠까 합니다.

 

“가끔 뒤로 물러서서 멀리 내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노력으로 세워지지 않는 나라일뿐더러 우리 눈길로 가 닿을 수도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느님이 하시는 거대한 사업의 지극히 작은 부분을 평생토록 감당할 따름이지요.

우리가 하는일 어느 것 하나 완전하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손길이 미칠 수 없는 저 너머에 있습니다. 어느 선언문도 말해야할 내용을 모두 밝히지 못하고 어느 기도문도 우리의 모든 소원을 담지 못합니다. 어느 고백문도 옹근 전체를 담지 못하고 어느 방문도 돌봐야할 사람을 모두 돌보지 못합니다. 어느 계획도 교회의 선교를 완수 못하고 어느 목표도 모든 것에 닿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어느 날 싹틀 씨를 우리는 심습니다. 그것들이 가져다줄 미래의 약속을 생각하며 우리는 뿌려진 씨들 위에 물을 주지요. 그 위에 벽돌들이 쌓여지고 기둥들이 세워질 내일의 건물에 기초를 놓고, 우리 힘으로는 해낼 수 없는 효과를 내다보며 반죽에 누룩을 섞습니다.

우리는 만능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할 때 거기에서 해방감을 느낄 따름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게합니다. 턱없이 모자라지만, 이것이 시작이요 하느님 은총을 세상에 임하도록 하는 걸음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끝내 결과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건축가와 목수들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건축가가 아니라 목수들입니다. 메시아가 아니라 사제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닌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