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랑은 이렇습니다(2013.07.29 대한문 쌍용자동차 분향소 앞 매일미사 113일째 강론)
2013년 7월 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대한문 매일 미사 113일째 강론
요한 11, 19-19-27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다양한 인물들로 이루어진 다채로운 이야기가 성서만큼 풍부하게 담겨 있는 작품은 아마도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배신과 회심, 헌신과 열의 그리고 폭풍 같은 격정과 뜨거운 연민,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욕망부터 고요한 침묵까지, 인간사의 장구한 서사 뒤에 이를 촘촘하게 떠받치는 다양한 군상들의 이야기는 다름 아닌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기에 더욱 성서는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그 다양한 인물상들에 비하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마르타 만큼 따분한 인물도 드물 것입니다. 동생 마리아와의 미묘한 관계에서 가지는 그녀의 고민과 불평, 예수의 응답은 마치 뻔한 답안처럼 판박이 해석과 강론의 전형적 해설을 낳았다면 오늘 읽혀지는 마르타의 예수님에 대한 고백은 온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처럼 너무 장엄해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 중 그녀의 입을 통해 고백되는 예수님을 곰곰 듣고 있자면 그녀는 분명 신앙의 정수를 이미 알아채고 있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합니다. 그것은 자신 신앙에 대한 깨달음 이전에 하느님이 누구이고 예수가 선사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는 ‘통달’에 가깝습니다.
행간을 자세히 읽어봅니다. 늦게 당도한 예수님에게 이미 그 없이 죽어간 오라버니의 죽음에 대하여 안타까워는 하지만 이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시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어제도 그리고 지금도 내일도 변함없이 알고 있다 말합니다. 마지막 문장이 그녀가 도달한 신앙의 정수가 무엇인지 훤히 밝혀줍니다. 비록 오라버니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을지라도 그 사실과 무관하게 그녀는 지금도 예수를 신뢰하고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조건 없는 신뢰이고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흥정과 주고받는 것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 '조건 없음'은 무모하고 나아가 위험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헌신도 무조건적 신뢰도, 아무것도 필요치 않은 사랑도 그리고 숭고한 희생도 문학작품 속에서나 읽혀지는 옛 이야기가 되어 버린 오늘날, 그녀의 사랑은 참으로 순진하고도 소박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예수님을 향해 가지는 무조건적 신뢰와 사랑은 역으로 그녀가 알아챈 하느님의 속성인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신이 인간의 육신을 취했는가?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질문에 답하지만, 아니 그리 배워 알고 있지만 기실 그것이 나의 고백인지 묻게 됩니다. 사랑 때문이라지만 변변한 이유가 없는 그저 알길 없고 헤아릴 길 없는 ‘신비’ 그것이 육화의 신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사랑해서 신은 억겁의 시간을 쪼개 한없이 나약한 인간의 육신으로 우리들 사이에 머물다 떠났다는 이 사실을 과연 누가 온전히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신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명석한 두뇌와 다양한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가톨릭 사제로써 살다가 환속하여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이반 일리치(Ivan Illich, 1926-2002)는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모든 것들에 의심 갖게 합니다. 역사가였던 그는 현재라는 기준으로 과거를 뒤돌아보는 통상적인 역사해석을 넘어 오히려 과거의 시선으로 현재를 가늠하기 위해 역사를 공부한 이였습니다. 근대라는 확실성, 즉 우리가 누리고 우리가 처한 오늘날의 수많은 질서와 규범, 법과 제도의 근저를 이루는 기본 가치개념들이 우리가 생각하듯 그리 확실하고 부동한 무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과거의 시선으로 오늘날을 바라보면 풍요와 발전이라는 상승곡선은 꼭 상승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상승곡선과 더불어 근대의 시작과 함께 인간은 빈곤과 결핍, 그리고 상실을 경험했다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가난은 오늘날처럼 부나 지위, 명성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삶의 조건, 삶의 필연이었고 이 때문에 그 가난의 처지, 그 한계를 받아들이며 자연스레 종교와 문화와 같은 다양한 사회적 표현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통사회에서는 가난은 ‘지혜로운 인간’을 탄생시킨 반면 오늘날의 가난은 끊임없이 박멸해야할 대상으로 인식되면서 인간을 오히려 ‘곤궁한 인간’, 즉 무언가 부족하다는 강박과 결핍감에 빠진 인간을 탄생시켰다는 것입니다. 삶의 필연, 즉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한계, 인간의 조건은 근대의 인간이 보듯 곤궁한 존재들이라기보다는 그 삶의 애환을 온몸으로 살았던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기쁨과 슬픔, 열정과 헌신, 희생과 거룩함과 같은 감정들 모두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근대의 경제적 관념으로, 즉 조건달린 수고와 사랑에 익숙한 근대인들의 가치개념에서는 화가가 일생을 불태워 완성한 미술작품이나 청력을 잃어가면서까지 작업에 몰두했던 음악가들의 작품은 이해될 수 없는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예술작품이 아무 쓸모없는 일이라 말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리치가 간파하듯 인간 내면 저 깊은 곳에, 근대에 의해 학습되고 훈육된 가치개념 너머의 태초의, 순수의 ‘삶의 필연’을 받아들이고 이를 억척같이 살아갔던 인류가 몸속에 새겨 놓은 기억들, 그 근저를 다시 헤집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경제적 인간으로 환산될 때 사랑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실용적 선택을 해서 얻은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직접적’이며 ‘우연적’인 무엇에 가깝습니다. 기실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무엇 때문에 길을 가다 강도만난 이를 살렸을까요? 그것은 말 그대로 삶의 조건, 삶의 필연, 아니 우연이 전해주는 은총에 가까운 것입니다. 왜냐고 따져 묻거나 또는 어떤 조건이나 경제적 가치로 도통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랑의 직접성’이라는 것입니다. 육화의 신비 역시 그러합니다. 그저 사랑해서. 아무 조건도 전제도 없습니다. 사랑에는 답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을 다시금 확인받고픈 여인이 남자에게 묻습니다. “날 왜 사랑해?” 남자가 한참을 고민하다 말합니다. “그냥, 사랑하니까.”
마르타가 간파한 하느님의 사랑, 그 조건도, 대책도 이유도 없는 직접적인 사랑은 일리치가 근대인이 잃어버린 태초의 감각, 곧 지고지순한 사랑인 것입니다. 육화의 신비가 바로 그 사랑의 극점을 이룹니다.
제 1독서의 바오로 사도역시 마르타가 통달한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막무가내로, 조건 없이, 온전히 사랑의 주도권을 틀어쥔 하느님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겠다하니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가 사랑하니 사랑받는 것입니다. 이유도 조건도 없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신비는 이로써 알길 없어 신비가 아니라 그 조건 없고 이유 없는 그것이 속성이기에 신비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그의 사랑은 희망에 가깝습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선물을 줄 사람의 자유로운 바람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113일째 매일 미사를 올렸습니다. 변한 게 하나도 없지만 동시에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제들은 이 대한문에, 쌍용자동차에 목을 매고 살아 가냐 물어오곤 합니다. 답은 이러합니다. 모릅니다. 우리도 모릅니다. 그저 생면부지 노동자들의 눈물이 어느 날 내 집의 문지방을 넘어 잠자리까지 전해져 슬프게 했고 더 이상 가만있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연이자 필연입니다. 그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 은총에 응답했을 뿐이라고 날이 거듭될수록 이러한 사실을 보다 분명히 깨달을 뿐입니다. 대한문을 지키고 이 자리를 우리가 떠나지 못하는 이유, 최종 목적은 사실 노동자들의 원직복직이나 국정조사가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기대’일 뿐, 기실 우리가 찾는 것은 희망입니다. 기대 너머의 희망, 곧 각자 각자가 언젠가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가는 날, 교우와 시민은 삶의 현장으로, 사제는 성당으로, 노동자들은 공장으로 돌아간 그날, 다시금 이 삶의 조건, 우연의 사랑, 직접적 사랑에 온전히 응답하고 온몸으로 사랑하길 바라는 것이 우리가 품는 희망의 유일한 목적지 인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그것은 모호합니다. 희망이 어쩌면 모호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경제적 관념에서 우리의 기도만큼 딱한 기도도 없을 것입니다. “미래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건 사람을 잡아먹는 우상입니다. 제도에는 미래가 있지만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입니다.”(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중)
우리를 훑고 지나가는 113일은, 쌍용자동차 동지들을 훑고 지나가는 1600일은, 콜트 콜텍의 늙은 노동자들을 훑고 지나가는 2400일은 그저 상처도, 또는 다가올 내일의 기대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 날수만큼 내 뱃속에서 자란 희망입니다. 희망은 자연스런 선의를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때문에 무모합니다. 우리들은 왜 우리가 여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무모합니다. 그저 우연에 주춤하고 은총에 응답했고 희망을 일구고 있을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