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다 (강론)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2013년 6월 3일 대한문 57일째 매일미사)

바깥 주인장 2013. 6. 4. 00:49

2013년 6월 3일

쌍용자동차 대한문 분향소 철거 후 57일째 매일미사

마르코, 12,1-12

  

지금은 사라진 공장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부평의 콜트 기타 공장. 정리해고와 위장폐업에 맞서서 늙은 노동자들이 싸운지 벌써 7년째입니다. 근 2년 동안 그곳을 드나들며 미사도 하고 밥도 얻어먹었습니다. 서먹한 웃음으로 시작했던 만남이었지만 이제는 천막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단박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알정도가 되었습니다. 싸움이 길어져서이었겠지만 기계가 빠진 공장을 찾았을 때는 당장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처럼 여기저기 폐기물과 쓰레기 천지로 폐허가 따로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함께 힘을 모아 싸우자는 취지로 대전에서 올라온 콜텍 악기 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바지런한 손들이 움직였고 공장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쓰레기들이 치워지고 밥을 지어먹던 주방 천막도 산뜻해졌습니다. 투쟁 2000일쯤 되었을 때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이 많이도 찾아왔습니다. 아마도 텅 빈 공장 구석에서 겨울이고 여름이고 한뎃잠을 자야하는 처지보다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외침에 모르쇠로 일관하는 회사와 사람들로부터 점점 잊혀져가고 있다는 고립감의 길고 지루한 진공의 시간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도 또 400일이 넘었습니다. 공장은 헐렸고 그나마 찾아오는 손님들과 따신 밥을 나누던 주방 천막도 없어졌습니다. 조막만할 때 데리고 온 강아지는 송아지마냥 자라 더 이상 키우기가 힘들어 다른 곳으로 보내야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장 건물의 잔해를 나르느라 드나들던 트럭들을 속수무책 쳐다보며 담배만 한참을 피웠습니다. 빼앗긴다는 것, 잃어버린다는 것. 상실감이 무엇인지 저는 그때야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다들 그랬습니다. 우리에게 그 공장은 투쟁을 위한 임시 거처가 아니라 이미 ‘우리집’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다 빼앗겼습니다. 남은 거라고는 찌그러진 들통과 불에 눌어붙은 플라스틱 밥주걱 같은 남루한 살림살이와 주름과 흰머리가 늘어난 늙은 노동자들, 그리고 크나큰 상실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남은 또 한 가지, 흰색 아크릴 물감으로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라고 적혀있는 싸구려 의자입니다. 자칭 파견미술가라는 작가들이 찾아와 꾸며놓은 의자입니다. 어려운 단어 하나도 썩지 않은 그 문구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오늘 1독서와 복음의 연결고리는 아마도 ‘땅’일 것입니다. 이방인의 땅에서 동족의 주검을 거두는 토빗과 자신의 땅에 들어갈 수 없는 포도밭 주인의 빼앗긴 들입니다. 동족의 죽음에 차려놓은 잔치 음식의 맛이 써서 이내 식사를 물리는, 그래도 이방인의 땅에서 이 구차한 삶을 이어가야하는 ‘유형의 마음’입니다. 복음은 그에 반해 더욱 극적입니다. 자신의 땅을 빼앗긴 주인,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보낸 이들마저, 사랑하는 아들마저 때려죽이는 참극을 지켜보는 못난 주인의 마음입니다. 땅은 극악무도한 이들의 차지가 되었고 동족의 주검을 수습하는 것이 중죄가 되어버린 땅, 이제는 우리들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삶이 무어라고 연명해야하는 처지가 참으로 구차하고 안쓰럽습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태 이후 사고가 난 1호기에서 불과 25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사키 다카시. 이 은퇴한 노교수가 남긴 “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다”라는 책에는 하루아침에 ‘뿌리 뽑힘을 거부하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피폭에 24시간 노출된 삶을 환영할리야 만무하겠지만 살던 땅을 떠나지 않겠다는 노교수의 고집은 이미 살만큼 산 노년의 완고함만은 아닐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그 재앙 한 가운데서 삶을 이어가며 핵의 유해함과 현재 인류가 얼마나 끔찍한 재앙으로 치닫고 있는지를 알리기 위해 그 누구보다도 열심입니다. 그는 책 여기저기서 이러한 재앙을 불러온 ‘국가’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는 ‘국가(state)’와 ‘나라(country)’를 구분 지으며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나라는 현 정부도 지금의 행정당국도 아니다. 우리에게 참된 나라는 선조들의 영혼이 숨 쉬는 이 아름다운 '대지'이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서 국가는 가해자이고 나라는 피해자인 셈입니다. ‘국가’는 대지를 빼앗은 극악무도한 이들이고, 백성의 거주지를 뿌리째 뽑아 버리는 적국의 침략자인 것입니다. 반면 ‘나라’는 그 침략자에게 들녘을 빼앗겨 삶의 밑동까지 잘려버린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비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책 이곳저곳에서 삶의 끈질김, 인내로 숙성되는 ‘무명씨’들의 강철 같은 생명력에 대한 애정과 인간 역사에 대한 신뢰를 표현합니다. 즉 재앙 한가운데, 재앙의 연속이었던 인류 역사의 저 밑바닥, 저 낮은 지층에서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수많은 무명의 존재들에 대한 신뢰 말입니다. 대지를 모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화염, 집시란 집시는, 유대인이란 유대인은 모두 씨가 말랐을 것 같은 비인간의 극치, 양차 세계대전의 재앙 그 한가운데서도 사람들은 몸을 부려 밭을 일구어 감자를 캐었고 사랑도 했으며 아이를 낳았고 빵을 구워 나눠먹었으며, 나아가 포로수용소 가스실의 학살에서 생환했습니다. 제국주의와 국가주의, 파쇼와 독재 그 어떤 것도 삶을 몽땅 뽑아버릴 수 없다는 인간 자신에 대한 신뢰입니다. 역사는 그런 의미에서 무명씨들의 것입니다. 저 높고 고매한 이름들의 것이 아니라 이 낮고 순박한 이름들의 것입니다. 콜트 천막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저 싸구려 의자가 바로 우리들의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빼앗긴 들에서 봄을 기다리는 억척스러움, 그것이 우리가 매일을 살아내며 보다 선명하게 느끼는 삶의 근성, 생의 속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의 항구함을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은 모두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땅은 아주 팔아버릴 수 없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 (레위기 25장 23절) 주인에게 몸 붙여 사는 식객들이 사람들을 쫓아내 두들겨 팼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 옛날, 대지를 정령들의 것으로 여기던 인디언 추장에게 알 수 없는 숫자와 기호들로 가득한 지도를 펴놓고 이쪽부터 저쪽까지 땅을 팔라 종용하던 유럽인들의 오만은 우리들 매일에도 반복됩니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2646명, 희생자 24명이라는 허망한 숫자. 이 무명씨들의 땅을, 거주지들을 저 모리배들은 송두리째 흔들어 뽑았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뽑히지 않았고 아무것도 뭉그러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 들풀들은 더 단단해졌고 인내로워졌으며 억척스러워졌습니다.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죽어나간 종들에 이어 아들까지 보냅니다. 그 포도원 밖으로 내다버린 아들의 주검을 거둔 것은 바로 이방인의 땅에서 유형의 삶을 이어가는 토빗같은 무명씨입니다. 모리배들이 두들겨 패 죽여 버린 널부러진 하느님의 인내를 거두어 고이 땅에 묻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 몸 붙여 살고 있는 유배지의 토빗인 것입니다. 신약 속 하느님의 마지막 인내를 거두어 드리는 것은 저 옛날 구약시절, 태곳적부터 그래왔듯 인간의 역사가 증명하듯, 다름 아닌 이름 없는 이들입니다. 그렇게 인류의 역사는 낮고 조용히, 하지만 한 번도 쉼 없이 그들로 이어지고 흘러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법천지가 되어버린 포도밭을 보고 탄식하는 이는 하느님인 동시에 가난한 동족들의 주검이 아무렇게나 유기되는 것을 보고 잔치의 음식을 물리는 토빗들, 바로 무명과 같은 작은이들입니다.

대한문에서 드리는 매일 미사지 맨 꼭대기에 적힌 끝도 없는 숫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나라를, 사람을 지키는 것은 들풀처럼 흔해빠져 여기저기 헤프게 살아가는 무명의 생명들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입니다. 빼앗긴 들의 봄을 갈망하며 동족의 주검도, 하느님의 인내도 모두 거두어드릴, 그래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쉼 없이 굴리는 우리는 이렇게 꾸준히 살아갈 것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일 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