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한 예언 (이주노동 2012년 11월호)
불길한 예언
장동훈 신부
얼마 전 대선 후보 하나가 초대받지도 않은 곳에 무작정 찾아가 세간의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던 전태일 열사를 기리기 위한 ‘전태일 재단’에 자신의 아버지로 인해 겪은 고초를 사과하고 더 나은 상생의 내일을 위해 화해하고 싶다는 제스처였다. 일면 그럴싸하게 보였지만 떠들썩하게 찾아간 그곳에서 그가 보인 행태는 진정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자들의 무리를 대거 대동하고 용서를 청하겠다고 찾아간 곳에서 그는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멱살을 잡아 짐짝처럼 한길로 내쳤다. 노동자들을 탄압했던 아버지의 과오를 사과하겠다고 찾아가서 다시 노동자의 멱살을 잡는 괴기스런 그날의 사건에 거대 언론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침묵했고 길바닥의 노동자들은 다시 쓴웃음을 지어야했다.
전태일 열사가 산화한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사람들은 ‘노동’이란 단어보다는 ‘근로’라는 말을 여전히 즐겨 쓰고 노동자들의 불안한 내일은 변함없다. 한 공장에서 일을 하던 수십 명이 차례차례 죽어나가도 눈 하나 꿈쩍 않는 정부 그리고 언론, 나아가 사람들의 냉담에 전태일의 이야기는 다시 아득한 ‘전설’이 되어버렸다. 길고 긴 시간, 노동자들의 각성과 비례해 이 땅에 절차적 민주주의가 자리잡혀갔지만 노동은 여전히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분야이며 논쟁의 자리임은 틀림없다.
1990년대 초반, 아직 제대로 된 이주 노동자에 대한 법적 틀도 없던 한국에 관광 비자로 입국하기 시작한 외국인들이 수십 년 전 전태일과 그의 동료들이 그러했듯 스스로 노동자임을 각성하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1994년 산업연수생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정부는 적절한 법률 마련은 뒷전에 둔 채 이주노동자들에 관한 모든 권한을 ‘중소기업 중앙회’에 넘겨버렸다. 결국 이로 인해 2004년 고용허가제 시행 전까지 수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어야했다. 어쨌든 고용허가제가 도입됨으로써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이 인정되긴 했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그들의 유쾌하지 않은 현실을 볼 때 우리의 갈 길은 아직 멀어 보인다. 아주 느린 속도지만 이주노동자들은 그들 스스로 노동자임을 각성하면서 한국의 내국인 노동자 선배들이 그러했듯 스스로 조합을 만들고 노동자로써의 권리를 찾았고 이러한 그들의 움직임은 역으로 노동 문제뿐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한국 사회 전반의 이해의 변화에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나는 언젠가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그들 역시 한국 선배 노동자들이 겪었던 진통들을 고스란히 겪어나갈 것이라 말한 적 있다.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나 가정은 물론 자신들의 목숨마저 지키기 힘겨워진 오늘의 한국 노동자 선배들의 처지 역시 전혀 넉넉지 않은 마당에 ‘노동자’로써의 이주노동자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언감생심이다. 하지만 이주라는 큰 틀에서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처지와 그와 얽혀있는 복잡한 실타래들을 풀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는 그들 안에 제이, 제삼의 전태일이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없다.
아주 짧은 시간 이주노동자들의 처지를 돌아보았을 뿐인 사람으로서 어줍지 않게 말이 많은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근래 인천교구 뿐만이 아니라 타 교구들이 직면하고 있는 이주라는 큰 틀 속의 이주 ‘노동자’ 사목의 모호한 정의와 범주화의 어려움들을 마주할 때마다 엄습하는 예감들은 불길하다. 한국 사회가 그러했듯 이주민에 대한 활동에 누구보다도 선구적이고 헌신적인 교회 역시 이주 노동자들 사이에서 제이, 제삼의 전태일을 다시 또 한 번 슬프게 직면할 수 있다는 경각은 없는 듯해 조바심마저 든다. 지난 8월부터 시행된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동 자유 제한 조처에 대한 당사자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그 움직임들 속 ‘함수’를 누구보다도 먼저 올바르게 해석해야할 주체는 정부가 아닌 교회가 아닐까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