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일기(칼럼)

한번은 제대로 울어라 (노동사목 2012년 1월호)

바깥 주인장 2012. 4. 22. 01:32

한번은 제대로 울어라

장동훈 신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그 밤이 고요하기만 했을까?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언덕 너머로 사막의 별이 건조하게 빛나고 따듯한 구릿빛 조명 아래 아기와 아기의 부모가 둘러앉았을 법한 그 밤, 정말로 고요하고 거룩하기만 했을까? 산고의 고통도 아기의 울음도, 그저 지켜보아야만 하는 아비의 안타까움 역시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신의 거룩한 탄생의 밤, 하지만 그 밤에도 울음은 있었다.

어미의 안락한 자궁을 나온 핏덩이가 울음을 터트린다. 울지 않으면 엉덩이를 때려서라도 울게 한다. 살아있다는 증거다. 태어나서 우는 놈만이 살아남는다. 울어야 사는 것이다. 죽음의 목전에서나, 시간의 격랑을 넘다가 상처받고 무너질 때나 터트릴법한 울음을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가장 먼저 배우는가보다. 나약과 쇠락의 상징이 탄생과 시작의 상징이라니, 인간 참 복잡하게 만들어졌다.

해고노동자의 19번째 죽음, 노동자의 분신소식까지, 해를 넘기기까지 너무 지난하고 답답한 한해였다. 그러면서도 섬뜩한 것은 내게 눈물이 말랐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죽음은 만져지지 않을 만큼 저만치 멀어져있었고 감정의 다발은 헛발질처럼 아득해졌다. 무디어진 칼이다. 아무것도 벨 수 없는 쓸모없는 칼처럼 서걱댔고, 가슴에는 그 무엇도 고이지 않아 헛바람만 픽픽댔다.

유난히도 추운 성탄날 밤, 콜트 콜텍 공장 안에 차려진 구유 위에 뉘어진 아기는 기계도 사람도 없는 빈 공장 닮은 나 같아 시큰했다. 신문뭉치 더미 위에 낯선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누워있다. 신의 탄생을 대접하는 것 치고는 너무 고약하다. 인간 세상의 온갖 추문을 담고 있는 신문 더미 위라니! 신문뭉치마다 지닌 사연들의 무수한 아우성에 아기의 울음이 얹어지는듯해 귀가 윙윙거린다. 울고 또 우는 세상 앞에 무디어진 칼로 서있는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울어야하는데, 울어야하는데 혼자 채근하다보니 누구에게 인지는 모르지만 더 미안해졌다. 미안해. 너무 미안해.

내 몸이 교과서다. 신이 그렇게 만들어놓았다. 단말마의 고통 앞의 쇠잔한 인간의 절규와 막 태어난 핏덩이의 세상과의 첫 대면을 포개놓았고, 나약과 쇠락의 몸짓과 탄생과 시작의 몸짓을 뒤섞어 놓았다. 무너지는 순간 흘릴 통곡의 눈물과 승리의 순간 흘릴 감격의 눈물을, 골방의 흐느끼는 고독의 눈물과 동지의 어깨를 감싸며 터져 나오는 연대의 눈물이 포개져있는 그런 내 자신이 교과서다.

다시 교과서를 펼 시간이다. 눈물을 태워버릴 만큼, 가슴을 비워버릴 만큼, 차라리 무딘 칼처럼 서걱대는 편을 택할 만큼 쉴 새 없이 육박해오던 지난 한해의 지난한 눈물과 아우성이 내가 또 새로운 한해를 버티고 살아갈 이유다. 그렇게 내 몸에 새겨있다. 신문 더미 위 탄생의 그가 그랬듯, 인간들의 도시를 마지막으로 내려다보던 최후의 그가 그랬듯 다시 울어야한다. 그래야 산다.

 

“삶이여 울어라/ 한번은 제대로 울어라/ 너의 슬픔을 넘어 모두의 슬픔으로/ 이 땅의 숨은 슬픔이 다 터져 나오도록/ 세계에 울리도록 우렁차게 울어라// 성난 얼굴들이 햇살 아래 나설 때까지/ 슬픈 얼굴들이 햇살 아래 빛날 때까지” - 박노해, ‘크게 울어라’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