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평등한 것 (외국인 노동자 소식지 2010 4월호)
Peeter Buegel,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 1565
부활은 평등한 것
장동훈 신부
'사목'(司牧 pastoral)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권위적 느낌 때문인지 이주사목을 담당하는 나와 나의 동료들은 자주 '시혜'적인 태도를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싶다.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가끔 우리의 입장을 늘 베푸는 자리에 있게 하고 더 나아가 그 수혜자와의 교감보다는 일방적인 시혜자로서의 무의식적인 권위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사회복지가 자주 '자족'에 불과하다고 폄훼되는 것도 사회복지의 이러한 시혜적 속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주사목을 담당하는 나 역시도 상담소와 진료소를 찾아오는 친구들의 속내를 알 만큼 제대로 된 소통을 했느냐는 질문에 선뜻 답하기 어렵다. 늘 바쁜 모습으로 혹은 한 발짝 거리를 둔 모습으로 '먼 나라' 친구들을 지척에 두고도 여전히 그들을 '멀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참회와 용서의 사순시기를 건너 부활에 이르렀다. 진짜 참회와 용서는 어떤 것일까 생각해보는 사순시기, 저 따듯한 곳에서 찾아온 이들 앞에 미적지근하고 적당히 친절한 모습의 나를 반성하게 하는 좋은 그림을 발견했다. 피터 브뤼겔(Peeter Bruegel)의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1565)이라는 그림은 참회와 용서 그리고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받아들이는 체험은 시혜적이고 수직적인 것이 아니라 평등하고 수평적인 것임을 차분하고 조용한 톤으로 이야기하는 듯하다.
웅성거리는 군중들 한 가운데 예수가 몸을 굽혀 무언가를 적고 있다. 여인은 자신 앞에 벌어지는 이 기괴한 광경을 어찌 이해할지, 당혹감에 손을 모으고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다. 노 사제들의 발치에는 여인을 내려치려 들고 왔던 돌멩이가 힘없이 떨어져있다. 예수는 목소리를 높여 간음한 여인을 대변하지 않고 다만 저 유명한 구절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먼저 돌로 쳐라"(요한 8,7)를 땅바닥에 말없이 적을 뿐이다. 벌써 화면 뒤편의 한 무리는 예수가 적은 문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뜨고 있다. 남아있는 이들 역시 감당하지 못할 권위에 실색한 것처럼 놀란 얼굴이 역력하다. 복음은 돌팔매질을 하려 모여든 모든 이가 떠나고 예수와 간음한 여인 둘만 남았다고 전한다. 예수는 여인에게 동정어린 말이나 몸짓이 아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라는 간단한 명제만을 던져주고 자리를 떠난다. 예수는 성난 군중 사이를 뚫고 여인의 곁에서 목소릴 돋우며 군중과 격론을 벌이지도 않았고 모두 떠난 자리에 홀로 남은 여인을 내가 너를 살렸다는 투의 시혜적 태도를 견지하지도 않았다. 다만 몸을 수구려 땅바닥에 무언가를 적었을 뿐이고 일장 연설이 아니라 용서받은 여인이 용서의 의미를 곱씹도록 홀로 남겨두고 자리를 떠났을 뿐이다. 예수의 태도 어디에서도 '권위주의'의 군더더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진짜 참회와 온전한 용서가 과연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몸을 웅크려 바닥에 무언가를 적는 예수의 모습은 그가 그토록 강조하던 '섬김'의 자세는 장황한 말도 아니고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수직적이고 시혜적인 태도도, 안쓰러운 동정의 눈빛도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다.
부활체험은 다른 게 아닐 것 같다.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체험, 그리고 베푸는 입장과 받는 입장이 어느 순간 모호해지고 무색해지는 제대로 된 '소통'의 체험이 진짜 부활이 아닐까? 좋은 프로그램과 멋들어진 시설보다 더 중요하고 참된 것은 상담소와 진료소에 찾아오는 친구들의 '무리'가 아니라 한 명의 '벗'을 알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 벗들 사이에서 벗으로 받아들여지는 '부활스러운' 사목을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