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선 그리고 우리 (외국인 노동자 소식지 2009 9월)
"이양선" 그리고 "우리"
장동훈 (빈첸시오)신부
"한 사회의 정수와 그 심리 상태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사회가 내부인과 외부인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어디에 긋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루스 멜린코프)
대항해시대, 유럽의 강국들이 식민 사업을 위해 바다를 이용해 미지의 땅으로 나가던 때, 보물섬과 동방견문록 등 수많은 이야기가 창조되고 전해지던 그 시대에 우리나라는 그 "이상한 배"를 타고 온 이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졌을지 궁금해집니다. 그 많은 여행기와 표류기중 작은 나라 조선과 관련된 것 중 가장 유명한 일화는 아마도 "하멜 표류기"일 것입니다. 1653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선원들이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 중 제주도에 난파하여 환대와는 거리가 먼 13년간의 강제노역과 유배기간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그린 이 여행기는 서양에게 비추어진 우리의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우리와 다른"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태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양선, "이상한 모양의 배"를 가리키는 이 단어는 작은 반도국가 조선이라는 나라가 서구와 처음으로 조우하던 근대에만 유효한 단어가 아닙니다. 근대의 격랑을 상징하는 이 이양선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그때처럼 위협적이고 거대하며 공포를 불러오는 압도적인 무엇 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우리와 다른 이들과 어떻게 공존하고 대화하는지 진지하게 성찰 하게하는 꼭 필요한 상징입니다.
러시아에서 한국인으로 귀화한 박노자씨는 늘 "우리"라는 우리가 즐겨 쓰는 단어의 위험성을 거침없이 비판합니다. "우리"라는 단어는 공동체를 의미하며 조화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우리 밖의 타자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며 배타적인지 알려주는 단초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나라, 우리동네, 우리집, 우리식구, 이 많은 "우리"안에 어쩌면 우리와 다른 이들과 살기에 아직은 서툴고 힘들어하는 우리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아직도 수많은 이양선들이 바다에 떠 있습니다. 그 바다는 "우리"라는 바다입니다. 가끔 이 이양선들은 불쾌하게 또 측은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우리"라는 바다를 배회하는 그들은 어쩌면 "우리"라는 빗장이 가지고 있는 매몰참을 반성하게 하는 거울일 것입니다.
수많은 이양선이 지금도 우리 주위에 떠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라는 이름으로, 혹은 원정결혼의 이름으로 또는 학대와 억압의 이름으로, 임금체불과 구타의 이름으로 우리주위에 부유합니다.
그들의 또 다른 이름은 그리스도입니다.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구원이 아닌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을 이야기했던 쩨쩨하지 않고 배포 큰 예수라는 사나이는 아직도 "우리"라는 우리가 가진 빗장을 풀어헤치길 간절히 기도하고 계십니다.
담도 빗장도 없는 바다가 되는 것, 흔들리는 배들의 암흑을 비추어주는 뭍의 그 흐릿한 불빛이 되는 것, 성난 파도를 피해 정박한 배의 든든한 동아줄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참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