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다 (강론)

'생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체론적 전망 (교리교사 환경특강)

바깥 주인장 2011. 5. 8. 14:09

 

'생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체론적 전망

 

장동훈 신부

가톨릭 환경연대 상임대표

 

* 이 원고는 2011년 환경생태 캠프를 준비하는 본당 교리교사들의 준비모임(2011 4 17)을 위해 작성되었다. 전문적 지식보다는 신앙과 생태문제를 어떻게 연관 짓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 환경사목을 담당하는 신부로써 두서없이 정리한 내용이다. 

 

 

1. 창세기, 세상 시작의 기록인가 신앙고백인가?

중학교 미션스쿨을 다녔다. 의무적으로 예배에 참여해야했고 종교수업을 받아야했다. 강우석군 사건이후 일방적 종교교육이 인권을 침해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지만 당시의 분위기로는 그런 말하면 학생과로 끌려가 두들겨 맞거나, 그렇다고 딱히 인권침해라는 의식도 없었던 듯하다. 여하간, 목사님의 종교 강의 중 다윈의 진화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창세기의 모든 내용을 ‘자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듣게 되었다. 뭔가 톱니가 맞지 않았다. 그럼 세상 창조 때부터 누군가,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 이외에 역사기술을 위해 또 다른 인간을 두셨는가라는 미궁의 의문이 들뿐이었다.

그렇게 세상창조 이야기는 간단한 이야기 같지만 어느 문화권이건 그 문화의 총화이다. 단순히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고 누가 만들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기록’문학이 아니다. 더욱 복잡하고 상징적이며 심오한 뜻을 지니고 있다.

창세기는 태곳적에 쓰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땅을 빼앗기고 바빌론으로 유배를 갔을 때 통곡하며 쓴 글이다. 성서학자들도 이것에는 이견이 없다. 땅을 빼앗긴 자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회상하고 참회하고 감사하는, 일종의 ‘회고적 문학’이자 ‘서사 문학’이다. 다른 말로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이야기’가 담겨있는 것이 창세기이다.

가장 먼저 쓰인 성경은 탈출기이다. 이는 성서가 일종의 회고적 문학이라는 면에서 일리 있는 순서인지도 모르겠다. 이집트 종살이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던 해방과 자유의 여정을 경험한 유대공동체의 첫 번째 ‘역사고백’인 것이다. 가슴 벅찬 해방을 경험한 유대민족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다. 그러고 보면 탈출기보다 후대에 써졌다는 창세기는 출애굽사건, 전쟁과 기아, 압제 등을 경험한 유대민족이 후일 그 사건들을 회상하며 총체적으로 ‘인간’과 ‘신’ 그리고 ‘역사’를 해석하고 하느님께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일종의 ‘고백록’인 것이다.

왜 인간은 이토록 죄를 짓고 사는가? (카인과 아벨) 왜 인간은 파멸할 육신을 지녔는가?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왜 해는 뜨고 지고 밤이 있는가? (세상창조의 날수, 날의 주기) 고통과 불완전한 인간의 나약은 어디서 오는가? (무화과나무와 죄의식)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돌보시나? (손수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에덴동산에서 추방) 나약한 인간은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하나? (지배하고 다스려라, 번성해라)

수도 없이 열거할 수 있겠다. 유대 백성이 이방인의 땅에서 서러움을 삼키며 고백한 일종의 하느님 고백, 인간에 대한 해석, 창조에 대한 해석이 바로 창세기다.

그러므로 창세기 안에는 고대 근동지방의 유일신관 속의 세계관을 정리하고 있다하겠다. 인간과 신, 그리고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자연을 비롯한 생태(Oikonia)와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이것은 더 나아가 고대 근동의 유일신 신앙인 유대교의 태반에서 자란 그리스도교의 세계관으로 이어지고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생태’는 ‘세계관’에 대한 문제이다.

 

2. 세상, 지배하고 다스려라 그리고 번성하여라. 인간아! (고대의 세계관)

창세기는 이런 의미에서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 즉 민족, 인간, 자연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의미의 ‘외부세계’와 어떻게 ‘관계’맺고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바로 ‘세계관’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교의 세계관이 꼭 구약적이거나 신약적인것은 아니다. 훨씬 복잡하다. 성서적 바탕 이외에 그리스도교 전승으로 이어진 역사적 부산물들도 그리스도교의 세계관을 만드는데 역할을 했다.

우선 창세기를 위시한 구약의 세계관을 보자면 ‘인간중심적’이다. 에덴동산의 수도 없이 많은 나무들, 숲, 동물들 중 유일하게 꼭 한 쌍만 있었던 것은 인간이다. 그것이 유대민족이 이해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태도이다. 유일무이하며 모든 것을 인간중심으로 만든 세상, 낮과 밤을 이루는 하늘의 주기도 구약적 시각에서는 인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코페르니쿠스의 등장이전 우주관을 주도했던 ‘천동설’은 지극히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의 발로이다. 인간이 발을 딛고 있는 땅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고 우주도 돈다. 그만큼 유대민족에게는 그리고 그리스도교에는 인간이 중심이었다.

구약적 세계관의 두 번째 특징은 ‘인간과 세상이 맺는 관계’이다. 창세기에 아담과 하와에게 그러하듯 세상, 더 협의로 동물과 자연은 인간이 지배하고 다스리고 유용할 ‘대상’으로 파악되고 있다. 여전히 인간중심적이다. 종속적이며 지배적이다. 그것이 세상과 관계를 맺는 유대 민족의 방식이다. 역사서등에 등장하는 수도 없는 투쟁과 전쟁들은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총화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선민사상) 이스라엘이 세상과 맺는 관계이다. 공존이나 조화보다는 세상은 투쟁의 장이고 정복해야할 무엇으로 여겨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대륙이 발견되었을 때, 유럽인들, 즉 그리스도교적 세계관 속에 살던 이들은 누군가 이미 살고 있는 땅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혹은 무시한 채 감히 ‘발견’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세상의 일부인 자연은 이런 의미에서 서구적 시각에서의 ‘자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인간을 이롭게 하는 목적만이 자연과 맺는 관계에서의 관심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의 신관은 이러한 인본주의적 (Humanism) 세계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표라 하겠다. 인간이 신을 닮은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을 닮은 도치가 일어나는 것이 이러한 세계관의 특징이다.

 

3. 중세, 인본주의의 망각과 초월적 세계 (이원론과 신적질서)

중세말기 인본주의자들이 등장했다. 그들이 기치로 내걸었던 ‘르네상스’(Renaissance)의 속뜻은 ‘재생’, ‘회복’이었다. 어떤 것으로 부터의 재생인가? 바로 고대의 인간중심적 세계관, 인본주의의 회복이다. 아름다움에 탐닉하고 호기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간에 천착하는 세계관이 고대의 관심사였다면 중세는 다른 양상으로 펼쳐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태와 가능태) 철학이 그리스도교 사상으로 묻어들다 중세에 들어 토마스 아퀴나스로 집대성되는 플라톤주의(신플라톤주의 neoplatonism)가 중심을 이룬다. 신플라톤주의에 태반을 둔 중세 세계관은 인간을 육신과 영혼으로, 세상을 인간과 신으로 나눈다. 육신이 부정한 것이 되고 인간이 느끼는 욕망은 죄와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의 인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중세의 ‘암흑기’라는 표현은 ‘인간의 편에서 이해된 것’이다. 육신과 물질의 부정은 인간을 세상과의 유기적 관계보다는 초월적 하느님에게로의 회귀, 현실세계의 무가치함으로 인도했고 결과적으로 세상은 (자연을 비롯한 인간의 외부세계) 한낱 ‘지나가는 무엇’으로 이해됐다.

아직까지 그리스도교적 생태관 같은 거창한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세는 오로지 신에게 집중한 시대였고 신이 이룬 신적질서에 자신의 자리를 찾아 사는 것이 도리이자 가치 있는 삶이라 여기는 세상이었다. 자연 역시 그 신적 조화 안에 일부분이었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었다.

하지만 중세는 매우 ‘영적’ ‘신중심적’ 세상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는 그 중세의 세계관을 지배하면서 인간의 감성과 세상과의 교감 따위를 철저하게 이원론적 사고로 양분하게 되었고 이는 ‘과학적 신앙’으로 귀착된다. 다시 말하자면 고대의 신들처럼 인간의 감정을 느끼던 신관에서 모든 것을 예정하고 톱니가 돌아가듯 질서와 조화로 꾸며놓은 ‘시계공 같은 하느님’을 받아들이면서 신비적 경험, 세상(자연)과의 교감 등은 부질없는 감정과 섞어 없어질 헛된 것으로 파악되었다는 것이다. (잉카문명을 멸망시킨 그리스도교 신앙과 미신이라는 신조어를 불러들인 동양에 전파된 그리스도교를 상기하자) 신플라톤주의와 같은 고대 철학이 신학을 가다듬고 분석하는 능력을 키워줬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과학적 신앙’이라는 표현은 과한 것이 아니다. 중세의 초월은 ‘이성’의 부단한 사고의 산물인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사상은 후일 아이러니하게 물질주의가 등장하면서 모든 물질을 분해하고 분석하고 심지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과학적 인본주의’의 태반 역할을 하게 된다. 실제로 우리나라 역시 그리스도교가 선교되기 전 ‘미신’(신이 아니다)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미신의 혁파는 근대문명을 상징했고 과학문명은 이성이며 좋은 것이고 샤머니즘과 같은 세상과의 영적교감은 반근대적이고 나쁜 것으로 호도되었다.

하지만 중세에도 분명 영적 교감은 있었다. 특별히 프란치스코 성인을 기억할만하다. 이성인의 경우 중세적 세계관에 성인 특유의 감수성으로 신적 질서를 인간을 둘러싼 모든 환경으로 끌어내렸다. 하늘에 나는 새, 늑대와 들판의 나무, 붉게 물드는 석양까지.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의 고통, 영혼의 감옥이라고 여겨지던 인간의 병든 육신까지도 모두 하나의 하느님 창조물이자 섭리의 예표라 여겼다. 그랬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온몸으로 사랑했고 새와 대화를 나누며, 늑대에게 설교했고, 해와 달을 형제와 누이로 불렀다.

이런 중세적 성인의 생태적 감수성을 언급하며 빠지지 말아야하는 것이 바로 ‘신비주의’이다. 신비가들의 극대화된 감성은 자신을 하느님과의 단독적 관계로 이해하기보다는 하나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했다. 복음에 대한 갈망, 하느님에 대한 갈망이 인간이라는 주관심사를 넘어서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과의 교감으로 발전한 것이 중세 신비가들의 특징이다.

 

4. 이성과 기계의 약진, 다시 인본주의!

중세신학이 어느 측면에서는 일종의 ‘과학적 신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시기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이성과 계몽을 기치로 내걸었던 프랑스 혁명 당시 노틀담 대성전은 ‘이성의 여신’으로 장식되었고 모든 교회적인 것은 미신으로 치부되었다. 신을 향하던 시선이 이제 온전히 인간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대의 부흥, 인간의 재발견이라는 뜻의 ‘르네상스’가 완성된다.

당대 교회는 세상과 어떻게 조우했는가? 이성의 약진에 교회는 당황했다. 주춤거리거나 거부하는 모습으로 일관했고 중세 말기의 불안한 징후처럼 터져 나온 갈릴레오의 지동설은 교회를 일대 혼란에 빠트렸다. 문제는 그리스도교적 인간중심주의와 계몽주의자들의 인본주의는 인간에 대한 주된 관심이라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전자가 이미 질서 잡혀있는 조화를 ‘해석’하는 정도였다면 후자는 ‘실증’하고 ‘증명’한다는 차이를 가졌다. 언뜻 듣기에는 간헐적 차이 같지만 그 결과적 양상은 판이하다.

하지만 서양문명의 태반이었던 그리스도교가 지닌 인간중심적 세계관은 새로운 사조에 일조한바,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지극히 ‘과학적’으로 파악하게 하였고, 인간을 둘러싼 것들, 즉 세상을 ‘자원’으로 이해하게했다.

이성주의, 증기기관의 발견, 인쇄술의 발전, 노동집약적 산업의 부흥, 노동의 소외. 모두 근대의 산물이다. 인간이 중심이고 인간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모터이다. 하지만 인간의 노동 역시 ‘자원’으로 이해되며 소비되는 세상이 되었다. 아동노동, 열악한 노동조건, 노동조합 탄생 등 19세기와 20세기는 산업화 이후 세상 전체가 투쟁의 장으로 변하였다. 대자본이 생겨났고 인간 역시 ‘노동력’으로 환산되며 소외를 겪게 된다.

과학의 발전은 세상을 인간중심적으로 해석하면서 세상을 ‘소비’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지만 역으로 인간 역시 ‘대상’(상품)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또한 과학의 발전은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끔찍한 기억, ‘양차대전’을 낳았다. 더 나아가 대자본의 약진은 노동집약적 산업을 이끌면서 지구 전체를 하나의 ‘자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전락시켰다.

북반구의 나라들은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정작 자원을 보유하고 있지만 수탈과 조직적 착취에 노출된 남반구의 나라들은 빈곤을 벗어날 수 없었다.

 

4. 세상. 신앙이 맞서야하는 무엇인가 뿌리내려야하는 토양인가?

끝 간 데 없는 산업의 발전과 빈부격차는 자원의 고갈과 극빈국가의 출현을 만들었다. 같은 시간대에 넘쳐나는 밀을 폐기처분하는 나라가 있는 반면 한줌의 밀이 없어 기아로 죽어가는 재화 분배의 불균형이 생겨났다. 세상은 단순히 소비를 위한 자원으로 대상화되었다.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는가?

노동소외, 인간의 도구화, 끊임없는 전쟁과 기아, 세계빈부의 격차를 목도하며 1891년 레오 13세 교황의 새로운 사태를 기치로 사회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신중심도 인간중심도 아닌 자본에게 잠식된 세상을 안타까워하며 적극적 사회제도 개선과 정치제도의 개혁을 필역했고 열악한 노동조건의 노동자들의 인권을 옹호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태어난 것이 2차 바티칸 공의회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1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세상, 세속적인 것, 즉 근대의 것을 죄악시 여겼다면, 세상과 화해하고, 세상 속을 걸어가며, 세상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구현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잉태했다. 가히 혁명적 사건이고 그리스도교 2000년사의 큰 획을 긋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그리스도교적 생태관이 확립된 것은 아니다. 다만 외부세계를 교회 자신의 태생적 기질로 파악하면서 좀 더 ‘관계적인 신앙관’을 확립했다는 것이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과다. 하지만 여전히 환경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는 여타 다른 사회세력과 동일하게 미미한 수준이었다.

인간의 사회구조와 외부세계의 부조리함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많은 이들을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을 잉태했고 남미라는 지리적 특성에 힘입어 사회구조 변혁을 분명한 목적으로 하는 해방신학(Theology of Liberation)의 태동을 가져왔다. 빈부격차, 강대국의 약소국에 대한 구조적 착취, 전쟁과 기아, 민족주의자들의 독립투쟁, 군부세력에 대한 민중의 저항 등, 남미라는 특수한 토양에 정치신학의 씨앗이 뿌려졌고 ‘토착화’의 열매로 ‘해방신학’을 배출했다.

‘토착화’라는 개념 자체가 과거 선교시대 행해지던 문화이식 시대의 외부세계와 관계하는 법을 180도 전환한 개념이었다. 복음이 문화로써 이식되고 권력으로써 기존 문화를 말살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세계’, 민족의 특수한 ‘토양’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개념은 분명 외부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토착화 신학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남미의 해방신학은 후일 역으로 유럽권에 수출되면서 서서히 “외부세계와 어떻게 관계 맺는가?”라는 좀 더 ‘유기적 관계 신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5.유기적 관계로서의 생태, 전체적 전망으로써의 그리스도교 신앙

얼마 전 우리는 일본 지진과 원전폭발을 경험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보다 더 강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보도를 전해 들으며 불안감이 엄습했다. 인간이 자연까지도 길들일 수 있다고 믿었던 어리석음에 대자연은 여전히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한 듯하다. 자연의 역습은 단순히 재앙이 일어난 그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웃국가, 더 나아가 인류전체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우울한 전망으로 발전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의 이번 참사는 세계경제를 불안하게 하였고 원유 값을 폭등시켰고 부품 조달과 수출이 막히면서 이웃국가 몇을 넘어 전 세계 경제인구의 전체고민이 되었다. 이제 한나라의 비극이 아니라 인류의 비극이다. 환경문제는 비단 환경문제만이 아니라 인류의 문제가 된 것이다.

과학문명과 인간의 오만, 심각한 대기오염과 환경오염이 20세기 중후반 유럽과 북반구의 나라들을 ‘환경’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좀 더 친환경적, 자연친화적 구조물과 산업구조, 자연보호구역의 확대와 동식물종 보전운동 등 다양한 노력이 펼쳐졌다. 심지어 이러한 환경적 관심은 정치 세력화되어 녹색당을 출범하게 하였다.

하지만 북반구의 지속적이고 역사적인 수탈로 빈곤과 환경파괴 등을 감내하는 남반구의 대부분의 국가에 대하여는 이중적인 태도를 견지한 것이 사실이다. 북반구의 소비를 위해 탕진상태에 이른 남반구는 북반구에서 생산되는 폐기물과 오물의 하치장으로 전락했다. 북반구의 환경에 대한 관심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며 자본주의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리스도교의 ‘생태관’을 말할 때다. 어떻게 환경문제와 생태라는 말이 지니는 ‘포괄적 외부세상’과 관계를 맺어야할까? 북반구의 나라들에서 생겨난 환경주의는 개인주의적 성향에 불과했고 그 기반을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소비’에 두고 있었기에 아름다운 자연풍광, 사람이 윤택하게 살만한 환경 등으로 관심사가 옮겨 발전했고 이는 남반구 빈국들의 고통과 환경오염과는 거리가 먼 ‘그들만의 환경운동’에 다름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세계관, 외부세상과 관계 맺는 시선은 북반구의 나라들과는 다른 양상으로 발전한다. 우선 정치신학과 해방신학의 수혜자들은 사회적 불의와 부조리를 사회 시스템과 구조의 변혁을 통해 개선하려하였고 더 나아가 가치관의 변화, 또 한 번의 ‘영의시대’(신비주의)를 필역했다. (영성은 다름 아닌 ‘가치’에 대한 문제이다) 차츰 ‘구조적 문제’에 천착하던 이들은 세상을 모든 존재의 ‘유기적 관계’로 파악하게 되었고 환경 문제 역시 북반구의 자기중심적 소비운동에서 전체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전체적 전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유기적 관계’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일본원전사고가 증명하듯 환경문제가 비단 환경문제뿐만이 아니라 경제 정치, 더 나아가 개인의 삶의 패턴도 변화시키고, 지리적 현상으로 국지적 문제로 남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 중국의 산업 성장을 위해 무한정으로 유입되는 원재료들은 남반구의 또 다른 자원 갈취와 상상을 초월할 쓰레기의 생산, 개인 삶의 파탄으로. 더 우주론적으로 나아간다면 북경의 들판을 날아다니던 벌의 개체수가 감소하면 북경 원예농업의 개화기와 수확기가 늦추어지고 더 나아가 인류의 식량난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 4대강의 강줄기를 일직선으로 만들면 물이 고여 강이 혼탁해지고 그 강물을 마시는 인간의 식수 소비에도 영향을 미치며 경제적 부담으로 발전한다는 것.

이러한 생각은 최근 ‘환경정의’라는 말로 새롭게 회두되고 있지만 이미 그리스도교적 생태관에 내재되어있던 것이다.

창세기의 태초의 조화로운 세상, 프란치스코 성인을 위시한 생태적 신비주의자들의 사상, 근대발전이 뿜어내는 사회적 폐단에 좀 더 구조적이고 시스템적인 문제로 조망하고자한 정치신학과 해방신학 류의 ‘전체적 전망’. 이 모두가 위기에 직면해있는 인류 앞에 그리스도교가 새로운 전망을 내놓게끔 하는 양분의 역할을 했다.

인류는 파멸을 향해가고 있다. 자기중심적, 웰빙(Well-being)류의 개인 구도적 자연 섬김은 이제 이 극도로 팽배해진 불안감을 불식시키기에 역부족이다. 좀 더 전체적 전망, 유기적 관계의 영성이 필요한 시대이다. 그리스도교가 바로 그러한 새로운 생태관, 가치관, 세계관을 제공하여야한다.

예수는 신이다. 또한 인간이다. 파멸할 육신까지도 인간으로 살았던 존재이다. 신인 동시에 인간이었던 존재. 바로 이것이 이 위기를 해결할 열쇠가 될 것이다. 인간의 문제는 단순히 인간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신이 창조한 모든 창조물들의 실존에 직결되는 문제다. 한 때 육신과 세상을 영혼의 감옥 정도로 여겼던 중세적 세계관은 다시금 세상을 긍정하게 하였고 더 나아가 세상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하느님의 길에 오를 수 없다는 생각으로 변하였다.

생태는 단순히 환경공학적 문제가 아니다. 영성이고 길이고 구원의 여정이다. 좀 더 윤리적인 소비, 이타적 소비, 유기적 관계망의 깨달음만이 죽음의 막다른 골목을 질주하고 있는 인류를 구할 길이다.

2000년 전 세상을 떠난 예수의 기억이 여전히 현재에도 구가되고 많은 이들을 통해서 재현되는 것은 그 ‘빈 무덤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은 성령의 역할이다. 성령은 이런 의미에서 원체험을 기억하고 있는 인류의 기억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창조주로서의 초월적 하느님, 성부는 파멸할 육신까지도 짊어지고 살았던 성자를 통해서만이 파악되고 이해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역시 이러한 유기적 관계, 생태적 전망 안에서 파악된다.

우리는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있으려면 네가 있어야하고 우리가 있으려면 당신들이 있어야한다. 인간의 ‘집’, ‘거주지’는 비를 피하고 바람을 막는 물질의 덩어리뿐만이 아니다. 가족, 눈에 보이지 않는 애정과 관계. 그리고 이웃, 더 나아가 마을과 사회, 인류로 확대되어 나간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적 생태관이고 예수가 가르쳐준 가치이며, 하느님의 ‘시선’, 세계관이다.

환경에 대한 관심은 비단 대기오염을 걱정하고 쓰레기를 줄이며 하루 이틀 정도의 불편한 삶을 감내하는 것으로 끝나선 안 된다. 환경에 대한 관심은 결국 인간에 대한 관심이고, 개인이 아닌 우리에 대한 고심이며 인류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충실함이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전해줄 것은 며칠간의 ‘특별한 체험’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전해줄 것은 새로운 가치관, 모든 것을 전인적으로 전체적으로 조망할 하느님의 ‘시선’이다. 지루한 강의를 끝까지 들어준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