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일기(칼럼)

미련스러워지라한다 (노동사목: 노동자주일제정 10주년 특별호)

바깥 주인장 2011. 4. 19. 21:24

 

미련스러워지라한다

장동훈 신부

 

봄이다. 겨우내 입었던 옷을 정리하고 켜켜이 묵혀있던 차가운 먼지들도 털어내며 덩달아 꽃구경에 설레는 때이다.

겨울옷을 정리하다보니 점퍼 두 개에 손가락만한 구멍이 둘이다. 몇 십 년만의 혹한이었다는 지난겨울이 남기고간 흔적이다. 연말과 연초, GM대우자동차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의 농성장을 맴돌며 얻게 된 것은 비단 난로 불똥이 만든 외투의 구멍만이 아니다. 날수가 거듭될 수 록 하나둘 쭈뼛쭈뼛 인사를 건네던 노동자들의 ‘고해성사’같은 고백도 지난겨울의 훈장이라면 훈장이다. 머쓱해져 다가와 자신들의 세례명을 말하며 신자임을 ‘실토’하는 이들을 만나며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쉬는 신자’를 자처하던 그들 대부분은 과거 노동사목에서 세례를 받았고 한솥밥을 먹던 이들이다. 다들 어딜 다녀왔을까? 긴 세월 함께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과 함께 노동사목이 혹여 ‘냉담자양성소’는 아닌가싶어 난감했다.

 

노동사목이 가장 힘없는 이들의 사랑방을 자처하며 눈물을 받아주고 함께 분노한지 30년이다. 벽안(碧眼)의 선교사 신부부터 선배사제들, 혼신을 다했던 활동가들 그리고 수많은 노동자들 모두 노동사목의 벽지처럼 켭켭이다. 긴 세월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불온한 이들의 집회장소라도 되는 듯 노동사목 앞을 서성이던 경찰들의 눈은 이제 없다. 노동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늘 자리했던 다른 교구의 노동사목들도 문을 닫은 지 오래다. 남은 거라고는 꾸역꾸역 노동사목을 챙겨온 인천교구의 미련스러움이다. 지금 이 자리,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가 더 이상 노동사목이 필요 없어졌다는 기쁨의 소회를 적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자리는 다시 가장 힘없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여전히 정리해고라는 ‘법적 살인’에 노출되어있는 노동자들이 대신했다.

이 모든 슬픔을 담기에는 여전히 조막만한 가슴이다. 기라성 같은 선배신부들과 노동사목을 사랑했던 이들의 가슴 크기에 들이밀기도 민망한 소심(小心)이다. 하지만 노동사목의 닳디닳은 밥솥 같은 미련스러움에 기대본다. 다시 밥도 짓고 나물도 무쳐서 함께 나눌 것이다. 그리고 함께 울 것이다. 한 곳만을 쳐다볼 것이다.

 

2002년, 부평 대우자동차의 대량해고사태를 안타까워하며 기념하게 된 노동자 주일도 벌써 십년을 맞았다. 미련스러움으로 치자면 주교님도 만만치 않으시다. 좀 더 세련되고 멋들어진 기념일을 놓아두고 30년이라는 우직함에 다시 기념일까지 달아 무쇠 솥 같은 미련스러움으로 살라 부탁하셨다. 미련스러워지라한다.

난세(亂世)다. 슬픔이 범람하여 모두 집어삼킬 것 같은 시대이다. 지금까지 주교님과 선배신부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믿어 의심치 않은 수많은 이들이 그러했듯 미련스럽게 다시 또 한 곳만을 바라볼 때이다. 다시 또 낮은 곳으로 내려갈 때이다. 다시 복음에 천착(穿鑿)할 때이다. 그것이 교회이고 예수의 ‘기쁜 소식’이며 죽음에 먹히지 않았던 스승의 길이다.

 

지금까지 노동사목을 아껴주고 사랑해준 수많은 노동자들, 그리고 아낌없이 마음을 나눠준 주교님들을 비롯한 선배사제들, 수도자들과 교우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아울러 다시 또 ‘낮은 곳’으로, ‘후미진 곳’으로, ‘복음’으로 내려가려는 우리의 발걸음에도 힘내라고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