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외국인노동사목 2011년 3월 소식지)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장동훈 신부
새벽 어스름에만 만나는 사람이 있다. 내가 깃들어 사는 건물의 청소를 담당하는 자매님이다. 출근 시간 한참 전에 4층 건물을 연신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정리한 후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사라지는 분이다. 새벽녘 계단 어귀에서 만나 어정쩡하게 인사하는 사이라 성함도 연세도 잘 모른다. 명색이 노동사목 신부인데 창피스럽게도 임금은 고사하고 어디살고 정확히 몇 시에 출근하는지 지금껏 한 번도 궁금해본 적이 없었다. 지난겨울, 내 어머니 또래의 홍익대학교 청소용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해고소식을 언론을 통해 들은 후에야 새벽녘에나 만나던 자매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 존재하지만 꼭 보이지 말아야하는 규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 또는 퇴근 후 우렁각시 마냥 어지럽혀진 곳을 정리하는 청소용역노동자들은 대부분 비정규직 계약직이다. ‘얼굴 없는’ 노동, ‘그림자’ 노동이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그림자 같은 존재들’, 무슨 거창한 철학 명제 같아 보이지만 이러한 처지의 노동자들은 그들뿐만이 아니다. 버젓이 일하고 있지만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또 한 무리의 ‘투명인간들’,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들도 존재의 무게감이 없기는 매양 한가지다.
‘존재감 없는’ 외국인노동자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인지라 이국땅에서도 사랑을 한다. 하지만 사랑도 그들에게는 녹녹치 않은가보다. 덜컥 아이라도 생기면 그렇지 않아도 빠듯한 살림이 더욱 모질어진다. 이 땅에서 태어났지만 국적을 받지 못하는 아이의 처지는 슬픔의 크기로 따지자면 투명인간 같은 자신의 부모들과 다를 바 없다.
처음에는 부평농장 영세공장들 한가운데 자리한 ‘노동자의 집’을 찾아오는 외국인노동자 친구들의 어려움을 들어주던 이주노동사목부 실무자들이 꾸던 그저 막연하고도 소박한 꿈이었다. 아이 때문에 공장 일을 그만두고 꼬박 아이와 함께 있어야만 하는 외국인노동자 엄마들의 고충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외국인노동자 자녀 주간 돌봄 공간, ‘품 놀이터’다. 집도 마련하고 재정도 마련하고 어렵사리 수녀님도 모셔왔다.
하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공동주택에 둥지를 틀은 탓에 관리실 직원이 ‘보육시설’로 오인했고 여러 규약을 들이대며 관의 인가 없이는 입주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관리실의 요구에 인가를 받고자 찾아간 구청에서는 담당공무원의 기계적인 대답만을 들어야했다. ‘G20세대’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소위 ‘글로벌’한 대한민국을 지향한다는 나라치고는 여전히 후진적인 관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수준에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담당직원은 ‘다문화가정’과 ‘이주노동자가정’을 구별할 줄 몰랐고 해당 지역이 어린이집 과잉공급 지역이라 인가를 내줄 수 없단다.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으련만, 담당자는 국가의 정책이 ‘통합’이니 아이들을 기존 어린이집에 보내라는 매정한 말도 잊지 않았다. 하기야 외국인 노동자 자녀에 대한 변변한 법령조차 없는 나라니 담당공무원의 이러한 처사는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책 중에서 두텁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 수많은 법조항의 묶음 어디에도 바로 눈앞에서 꼬물거리는 이 조그마한 이국의 아이를 품을 만한 조항은 한 줄도 없다. 나라가 좁다 하지만 이 조막만한 아이들이 맘 놓고 놀만한 땅 한 조각 없는 것이 대한민국 아량의 넓이이다.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열었다. 뒤돌아보면 참으로 무턱대고 일부터 벌렸던 나와 실무자들의 능숙치 못했던 일처리를 나무라가도 외국인 친구들의 어려움을 진심으로 담아낼 줄 알았던 우리들의 ‘초짜’ 같은 소박한 마음이 상처받지 않았길 기도한다. 진심이 꾸는 꿈은 그 어떤 법보다, 치밀한 계획보다, 독지가들의 거액 희사보다 위력적이고 따듯하며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꿈꾸는 진심’이 언젠가는 얼굴 없는 이들의 얼굴을 찾아주고 존재감 없는 이들의 존재를 묵직하게 만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