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어제에서 내일을 얻는다(경향잡지 2023년 5월)
교회는 어제에서 내일을 얻는다
신사참배와 교회의 성찰
지정학이라는 억센 힘
12년 만에 열린 한일 정상회담의 후폭풍이 거세다. 강제 노역에 대한 ‘제삼자 변제 방식’이 일으킨 파국이다. 하지만 그것이 ‘실리’든 ‘매국’이든, 앞서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사람에 관련된 문제라는 것이다. 이번에도 피해 당사자의 목소린 어디에도 없다. 치유도 청산도 아닌, 인간을 지워 버린 기술적 해법일 뿐이다.
물론 한국 정부의 옹색한 발상이나 일본의 무례함에는 나름의 배후가 있다. 미국이라는 일극 체제가 해체되며 세계는 빠르게 파편화되고 있다. ‘신냉전’이라고도 부르는 이러한 혼돈의 세계 속에 한미일 동맹만큼 미국에 절박한 것은 없다. 둘의 과거가 어쨌든 잘 지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미국 주도로 설계된 아시아에 대한 전후 구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쿄재판(1946년)과 반민특위(1947년)의 파행이 보여주듯 과거를 따져 볼 기회는 그때에도 없었다. 이렇게 본다면 미중일 사이에 끼어 있는 이 땅은 어제와 오늘만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의 내일마저 틀어쥐고 있는 셈이다.
더뎠지만 통렬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같은 오늘의 세계를 교황은 회칙 「모든 형제들」을 통해 “닫힌 세상”(104항), “산발적 세계전쟁”(259항)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열린 세상’을 상상하고 이룩하려면 ‘진실에서 새롭게 시작’(제7장 참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진실은 보복이 아니라 화해와 용서로 이끄는 밑거름이고, 용서는 기억과 함께 걸어갈 때만이 얻게 되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먼저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쓰라리고 수치스럽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일본 가톨릭 교회는 일본이 벌인 전쟁을 어떻게 마주해 왔을까? 일본 교회는 1970년부터 성명을 통해 전쟁을 반성하고 평화를 호소해 왔다. 하지만 전격적이었다고 볼 순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후속 작업의 하나로 1967년 지역 교회에 설립이 권고되었던 정의평화위원회(‘일본 정의와 평화협의회’)의 단독 성명들로서 보편 교회의 흐름에 동참하는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내용 또한 한일관계, 역사 교과서, 전쟁책임 등 특정 사안에 대한 논평으로 전쟁에 대한 총체적 성찰과는 거리가 있었다.
본격적이라면 1995년, 「평화에로의 결의 전후 50년에 있어서」라는 주교단 공동 성명이 처음이라 할 수 있다. 주교단이라는 상징성도 있지만, 일본 교회 자신도 군국주의에 짓눌린 피해자만이 아니라 전쟁에 협력한 공범이었다는 고백 때문이다. 전후 50년, 더뎠지만 통렬한 반성이 아닐 수 없다.
가장 어두웠던 시간
성명은 가장 먼저 신사참배 허용을 성찰하며 이를 교회의 전쟁에 대한 협력의 시점으로 인식한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극렬하게 강요했던 시기는 미국의 견제로 군국주의 팽창에 제동이 걸리던 1930년 즈음부터였다. 만주사변(1931년) 이듬해 만주국을 세웠던 것도 이 때문이다. 만주라는 거대한 병참기지를 배후에 두고 물자가 풍부한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뻗어 가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내부도 단속해야 했다. 전체주의국가에서 흔히 내면적 동화 작업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교육과 종교다. 신사참배는 물론, 중일전쟁 개전(1937년) 직후 군수물자 수탈을 위해 반포된 국가총동원령과 발맞추어 본토와 식민지 모두에서 강제된 궁성요배, 종교단체법, 창씨개명 등도 이런 맥락의 조처다.
실제로 이 시기 조치대학교 학생들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거부 사건(1932년) 등 참배를 둘러싼 당국과의 갈등은 마찰을 넘어 교회 전체의 매국 행위로 호도되었다. 교구장들은 신자들에게 신사참배가 종교적 행위와는 다르다고 알리며 ‘수동적’ 참여를 허용했고 주교단 이름으로 신문을 통해 국방헌금과 전투기 헌납을 약속하며 진화에 안간힘을 썼다. 이전 세기 혹독했던 박해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만주로부터
신사참배를 둘러싼 논란에 마침표를 찍을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1936년 교황청은 훈령(Pluries instanterque)을 통해 신사참배를 허용했다.
하지만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흥미롭게도 일본도 조선도 아닌 만주국으로부터였다. 오족협화(한족, 만주족, 일본인, 조선인, 몽골인)를 내세우며 유토피아를 표방했지만, 만주국은 일본 관동군에 의해 세워지고 운영되었다. 적법성을 검토한 국제연맹이 국가로의 승인을 부결하자(1933년) 일본은 연맹을 박차고 나왔다. 만주국은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일찍부터 교황청과의 수교 의지를 표출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바티칸의 보증이라면 국제사회에 어엿한 국가로 대접받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한동안 거부도 승낙도 아닌 침묵을 지키던 교황청의 속내도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승인하자니 그간 공을 들여 온 중국 교회가 위태로울 수 있었고, 거절하면 일본 교회보다 많은 15만 만주 신자들이 걱정이었다. 일제의 협력 없이는 볼셰비즘을 막아낼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도 뒤따랐다. 로마는 제3의 길을 고안한다. 정식 외교관계는 맺지 않은 채 교황사절의 권한을 부여한 대표를 세워 당국과 협의하도록 한 것이다. 법적으론(de jure) 승인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de facto) 승인한 셈이다.
이 ‘묘수’를 착안해 낸 이들 가운데 하나였던 당시 일본 교황사절 파올로 마렐라(Paolo Marella) 대주교는 신사참배 허용의 길을 여는 데 가장 영향력 있던 인물이기도 했다.
양심이라는 마지막 빗장이 풀리고
신사참배 문제의 가장 첨예한 논란은 그것이 훈육 차원의 시민의례인지 종교적 행위인지였다. 마렐라는 신사참배가 오래전 교회로부터 금지된(1742년 헌장 Ex quo singulari) 중국의례(공자숭배, 조상제사)의 쟁점과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작동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침 국민 통합의 하나로 만주국 정부가 의무화하고 있던 공자 숭배의 일종인 ‘왕도(王道)예식’의 결말도 과거의 파국과 다르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그에게 왕도예식의 향배만큼 교회의 존립이 달린 것은 없었다. 예식의 성격을 만주국 정부에 문의해 종교적 성격이 없다는 확언을 받아 내는 한편, 선교지 장상들의 의견을 모아 교황청에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를 제출해 1935년 마침내 승인을 끌어냈다.
신사참배에 대한 승인도 이듬해 비슷한 과정을 거쳐 빠르게 처리되었다. 소식이 퍼지자 교황청에는 비슷한 처지의 선교지들로부터 중국의례를 허락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문제의 소지가 될 만한 부분들을 제한한 부분적 허용이 지역별로 허락되다가 1939년 정식으로 허용(훈령 palne compertum est)되었다. 근 두 세기에 걸친 논쟁이 마침내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그러나 일제에 대한 협력에 걸려 있던 마지막 빗장이 풀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실제로 만주국에 대한 교황청 승인과 신사참배 허용에 숨은 조력자였던 마렐라의 개인 비서 다구치 요시고로(田口芳五郎, 1902-1978년) 신부는 군부로부터 파견되어 여러 차례 만주국 정부와 교회를 조율했고 제국주의적 색채가 강한 저작물들을 통해 만주국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이후에도 필리핀 등지에 보내져 교회와 일본군 사이를 중재하며 일제에 협조하도록 독려했다. 만주국 관료들을 “장식물에 불과한 존재들”로 묘사하며 “그 집의 엄연한 주인은 일본”이라고 말하던 그는 만주에서의 문제는 곧 일본과 모든 식민지 교회의 문제들과 다르지 않다고 믿었다.
어쨌든, 불의에 대한 협력이었지만 ‘가쿠레 기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 집안 출신으로서 박해의 혹독함을 잘 알고 있던 그의 이러한 행보는 교회를 지키려는 갸륵함의 발로였다. 일본의 전쟁을 아시아를 “해방하고 항구평화의 낙토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추켜세웠던(1943년) 도이 다쓰오(土井辰雄, 1892-1970년) 도쿄 대교구장의 발언도 다르지 않다. 교회를 지키려다 ‘교회’를 잃고 만 불운한 시대가 남긴 상처일 따름이다.
교회라는 세상의 빛과 그림자
신사참배 허용 훈령의 서두에 인용된 1659년 포교성성 훈령은 ‘선교 대헌장’이라 불릴 만큼 가톨릭 선교의 근대적 전환을 알리는 역사적 문서다. 골자는 지역 문화에 대한 존중과 적응, 선교의 정치적 순수성 회복이다. 선교를 ‘유럽의 이식’으로 착각하던 이전 세기에 비하면 실로 혁명적이다. 물론 중국의례를 비롯한 현지 문화에 대한 전환적 이해는 선교 경험이 축적되며 교회가 얻게 된 문화적 포용력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신사참배의 경우처럼 식민지라는 기형적 상황에선 예외다. 피지배 민족에게 그것은 전통문화에 대한 사랑이나 애국심의 표현이 아닌 지배 권력에 대한 굴종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아직 보편적 가치를 구체적 현실 안에 구현하는 데 서툴렀고 ‘문화’를 ‘체제’와 구분하지 못했던 셈이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기조도 이로써 불의한 체제에 대한 협력이라는 전력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의 빛인 동시에 그림자이기도 하다. 감광지의 얼룩처럼 교회도 세상의 얼룩을 덧입으며 걸어간다. 그러면서도 빛인 까닭은 때때로 얼룩이 그림자인 동시에 빛의 흔적임을 깨닫기 때문일 것이다. 어제에 대한 자기 성찰이 언제나 쇄신의 초석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일어나 비추려면’(이사 60,1) 먼저 어두움을 마주해야 하는 법이다. 쓰디써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