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일기(칼럼)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빛두레 2021년 7월)

바깥 주인장 2021. 7. 16. 15:22

 

안식년이 시작되었지만 바로 떠날 수 없었습니다. 전염병으로 발이 묶이기도 했지만 마치지 못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구 역사관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교구 설정 60주년인 올해가 오기 전에 끝냈어야 할 일이었지만 여러 곡절로 지난 3월에야 개관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를 전공하긴 했어도 전시 기획은 전혀 다른 영역이었고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문제는 다른 교구와 달리 교우촌이나 유명한 순교자를 배출한 순례지도 없는 상황이라 전시할 유물 등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교구 내 본당들의 협조를 얻어 유물을 발굴하고 수집했지만, 막상 전시할 것을 추리니 내용이 편중되고 맥락도 부족해 보였습니다. 순교자들을 배출하긴 했어도 조선대목구 시기의 일들이니 교구의 고유한 역사보다는 서울교구사 내지는 한국교회사의 일부라는 인식이 더 지배적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교자 후손들로부터는 여태 무관심하다가 왜 갑자기 이러는 것이냐는 타박부터 들어야 했습니다. 막막한 시간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실제 설계에 들어갔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계약을 맺은 ‘전시 전문 업체’가 우리가 내어준 주제와 자료를 바탕으로 전시 내용을 알아서 만들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참으로 안일한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이야기를 남의 입을 빌려 해보겠다는 것부터 잘못된 심보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연구소만이 아니라 본당 사목도 맡고 있던 제 처지와 서유럽교회사를 전공한 저보다는 한국교회사를 전공한 연구소 동료가 이 일에 있어서만은 더 적임자라 생각하며 조금은 책임을 덜어내고 싶었나 봅니다. 전문 작가들이 여러 차례 교체되다가 결국에는 모두 내보내고 직접 팔을 걷어붙여야 했습니다.

 

기존 자료들을 검토하고 연구소 동료 신부들과 회의를 거듭하며 차츰 새로운 시각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인천교구사’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사, 넓게는 보편교회사와 맞닿아 있는 개별교회로서의 ‘인천 교회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대목구로 설정(1961년)되고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교구로 승격(1962년)되어 ‘교부’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년) 전 일정을 참석한 초대 교구장. 가난한 신생 교구임에도 사회 안에 세워지는 교회라는 공의회 정신의 형상화라 할 수 있는 가톨릭센터를 타 교구와 비교해 상당히 이른 시기에 문을 연 교회. 강화 심도직물 사건 당시 ‘여공’들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주교단의 공동성명까지 끌어내며 한국교회 최초의 현실 참여를 견인했던 교회. 한국전쟁으로 서해 5도로 피난 온 가난한 이들 안에 ‘밥’과 ‘약’과 ‘빛’으로 생생히 살아있던 교회. 공장지대에 단칸방을 얻어 살며 노동자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였고 엄혹한 시기 시민사회의 뒷심이 되어주었던 교회. 모두가 숨죽여 있던 시절 검열로 누더기가 된 주보여도 쉼 없이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로 살고자 했던 교회. 공의회 정신의 총화라 할 수 있는 교구 시노드를 저 밑바닥 소리부터 훑어 들으며 온 마음으로 새롭게 거듭나길 원했던 교회. 실로 교구의 여정을 이끌어 온 것은 ‘세상 안에, 세상과 함께, 세상을 위하여’ 존재하는 교회라는 공의회의 고백이었고, 진정한 유산은 유물 따위가 아니라 ‘교회’를 이루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경쟁하듯 들어서는 순례지들과 교회 기념관들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저로서는 이런 일에 제가 연루될 거라고는 추호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과거의 영화만을 핥다가 혹여라도 오늘의 어두움을 외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모두가 오늘의 부끄러움을 외면하게 만드는 또 한 번의 상찬이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부디 미력하나마 이 공간이 오늘을 성찰하게 하고, 그 옛날의 선배들처럼 ‘눈이 열려’ 스승을 알아보던 엠마오의 길목이길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제 부족함을 참아주며 함께 길을 걸어준 연구소 동료 사제들에게도 미안한 마음과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