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다 (강론)

금요일의 행방(2020년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바깥 주인장 2020. 11. 1. 01:31

 

마태오 5, 1-12

 

모든 성인 대축일이면 항상 생각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성금요일 스승의 행방에 관한 것입니다. 교부들은 그날 스승이 죽음의 심연으로 내려가 가장 버림받은 영혼들을 구원했다고 말합니다. 평생에 걸쳐 줄곧 낮아지기만 했던 스승이 더는 내려갈 곳 없는 죽음의 밑바닥까지 닿았다는 사실에 우선 놀라고 낮은 이들과 같아지길 원했던 꿈이 생과 사의 경계 넘어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에 또다시 전율하게 됩니다. 죽음마저 뛰어넘는 거룩하고 숭고한 우애, 인간을 향한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래를 향한 이 집념의 모험, 깊은 형제애를 우리는 ‘성인들의 통공’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이를, 죽은 이가 산 이를 기억해주는 끊어질 수 없는 이 인간 사이의 유대의 끈을 그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를 위해 전구 해준다는 성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할 것은 따라서 단순히 그들의 위대함만이 아니라 죽음도 끓을 수 없는 우리 사이의 끈, ‘우애’인 것입니다.

 

지난 10월 3일 교황은 아시시 프란치스코 성인의 무덤 앞에서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문서에 서명합니다. “모든 형제들”이라는 제목의 ‘사회회칙’입니다. 서문이 밝히듯 “모든 형제들”이라는 단어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자신의 형제 수사들에게 남긴 ‘권고’(Ammonitio)의 첫 글자에서 따온 것입니다. 문헌 첫 문장을 통상 제목으로 여기는 교회 문헌의 관례를 고려한다면 ‘형제’, 그것도 ‘모든’이 암시하듯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형제애에 관한 내용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권고’를 쓰게 된 경위를 헤아리면 더욱 이번 문헌의 주제가 확연해집니다. 성인의 유명세 덕에 무섭게 늘어난 수도 형제들과 재산은 초기의 단순하고 소박한 삶의 방식을 더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처음처럼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가난하게 살아가자는 성인의 호소를 형제들은 외면합니다. 급기야 성인의 완고함에 지쳤는지 그를 공동체 밖으로 내쫓습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다시 공동체로 돌아온 성인이 부유해지고 커져만 가는 수도원을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았을까 궁금해집니다. 죽기 직전 그는 유언처럼 이 ‘권고’를 남깁니다. 그 첫 문장이 실로 감명 깊습니다. “모든 형제들”! 창립자라는 권위도, 쫓겨났다 다시 돌아온 이의 노여움도, 나만큼 너희들이 살 수 있냐는 교만도 없이 그저 평평한 바닥에 내려와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그것도 자신을 쫓아낸 원수들마저 끌어안는 “모든 형제들”입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 단순하고 소박한 청빈의 삶의 가치를 다시 일깨우는 그의 말은 ‘질책’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권고’라는 제목에 담겨있지만 시종일관 따듯한 형제애의 목소리를 잃지 않습니다.

 

새 회칙을 작성하는 중에 예기치 않게 닥친 팬데믹 위기를 언급하며 교황은 이렇게 말합니다. “갈수록 세계화된 사회는 우리를 가깝게 만들었지만, 형제로 만들지는 못했습니다.”(12항) 이미 오래전부터 개인적 이익에 몰두한 나머지 우리 실존의 공동체적 면모는 심각하게 약해져 왔고 이참에 그 어둠이 여실히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이 위기는 그러나 한 사람의 병이 모든 이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처럼 ‘공동의 배’로 항해 중인 전 지구적 공동체를 실감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혼자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오로지 함께해야만 구원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32항) 세계화라는 이름의 “문화적 식민화”는 지금까지 결국 인간을 기껏해야 ‘소비자’나 ‘관객’으로 전락시키면서 획일화된 생활 방식을 유일한 삶의 방식으로 여기게 했고 이 획일화된 삶의 밖의 것들을 배제하는 것을 자연스런 일처럼 여기게 만들어 버렸다고 고발합니다. “빛나고 위대한 꿈을 꾸며 자라왔던 우리가 고작 고립된 채, 홀로, 여한 없이 먹어치우는 것으로 끝나버렸다는 사실을, 닥치는 대로 ‘접속’하지만 우애의 맛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33항) 교황은 또 걱정합니다. 위기가 끝난 후 이에 대한 후유증으로 더 광신적 소비주의와 새로운 형태의 이기적 자기 보호가 들끓지는 않을지 말입니다. “재주껏 살아남기”가 급기야 “만인의 투쟁”으로 변하는 상황 말입니다.(36항)

 

어둠을 고발한 교황은 이제 전 영역에 요구되는 새로운 여정을 제안합니다. 전지구적 문제는 장벽의 문화로는 해결할 수 없음을 적시하며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범을 배울 것을 요청합니다. 편견, 개인적 이익, 문화적 장벽을 넘어 낯선 이를 도와주는 ‘이웃’이 되자고 호소합니다. 난민을 둘러싼 민족주의를 가장한 대중 야합적 선동꾼들과 경제 제일주의자들의 이기적 주장과 같은 장벽의 문화를 거두어 버리고 환대의 문화로 넘어가자고 제안합니다.(37-41항) 사회적 우정과 대화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보다 나은 정치, 국제정치 기구의 개혁을 통한 공동의 노력, 전쟁의 종식, 사형제 폐지, 기본권의 충분한 ‘세계화’, 이 모든 형제애를 위해 봉사하는 종교... 모든 영역에 걸쳐 교황이 초대하는 새로운 여정은 아주 작고 소박한 인물을 기억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아프리카 사막의 가장 깊숙한 곳의 가장 낮고 버림받은 이들과 같아지길 원했던 사막의 은수자 샤를 드 푸코입니다. 그는 모든 인간을 진정 자신의 형제로 받아들이길 열망하며 한 친구에게 이렇게 청합니다. “제가 이 땅 모든 영혼의 진정한 형제가 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오늘 복음은 행복선언입니다. 어부들을 제자로 삼고 곧바로 이어진, 공생활 맨 처음의 가르침인 만큼 스승이 걷기를 결심한 여정의 청사진과 같습니다. 가난, 슬픔, 온유, 의로움,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그러나 행복이라고 부르지만 하나같이 가난하고 무기력한 말들입니다. 실제로 복음은 이러한 말들에 어울리는 이들을 행복하다고 ‘선언’하지만 그들의 때는 앞으로 다가올 시간으로 남겨둡니다. 행복하지만 견디고 살아갈 현실은 여전히 고되다는 말이며 아직 마쳐야 할 여정이 남았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세상의 그것과 우리의 행복은 다르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회칙의 서두에서 언급된 프란치스코 성인의 존재도 다르지 않습니다. 회칙은 성인의 수많은 행적 중 술탄을 만나러 갔던 때를 꼽습니다. 성인은 교리를 논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모두가 형제라는 사실을 나누러 갔음을 기억합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십자군 전쟁의 한가운데서 말입니다. 나누고 구분하고 잘라내고 담을 쌓고 빼앗는 갈라진 세상 한복판에서 말입니다. 그 세상은 그러나 이후에도 건재했습니다. 그럼에도 성인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 힘없고 쓸모없는 말들을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들만이 갈라지고 찢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단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확신도 다르지 않겠습니다. 저 작고 보잘것없는 말들로 작고 보잘것없는 이들과 깊이 연결되었음을 깨달을 때, 쉼 없이 그들을 향할 때 비로소 ‘통공’의 신비를 온전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