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다 (강론)

갈릴래아, 인간을 향하여(2020년 1월 26일 연중 3주일 하느님 말씀 주일)

바깥 주인장 2020. 1. 25. 22:35

2020년 1월 26일 연중 3주일 하느님 말씀 주일

마태오 4, 12-23

 

예수를 수식하는 지명들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갈릴래아 인근 나사렛 출신이었고 예수는 이집트 피난길에 예루살렘 근처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탄생했지만 카나와 같은 첫 기적의 장소나 생의 대부분을 보낸 곳은 갈릴래아였습니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언급된 모든 지명은 서로 꽤 거리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빌라도를 비롯한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예수를 ‘갈릴래아 출신’으로 이해한 반면 복음사가들은 나자렛 출신으로 기억합니다. 각각의 지명은 나름대로 의미를 지닙니다. 베들레헴은 구약의 예언이 실현되는 의미에서, 나자렛은 다윗의 계보를 잇는 의미에서 필연적입니다. 하지만 생애 마지막 순간을 제외하고는 어디까지나 예수의 주요 무대는 공생활 대부분을 차지한 갈릴래아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오늘 1독서 이사야서의 갈릴래아에 대한 묘사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이사야 8, 23; 마태오 4, 15) 예수가 메시아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복음에서 갈릴래아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배경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즈불룬과 납탈리, 바다로 가는길, 요르단강 건너편’, 곧 이스라엘 북서부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북이스라엘이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에 멸망한 후 제국은 이 지역의 사람들을 정책적으로 이주시켰고 공지가 되어버린 이곳에는 이민족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나중에는 귀환한 유다인들이 뒤섞여 살게 되었습니다. 후일 로마제국은 이 지역을 헬레니화하면서 큰 도시들을 건립했습니다. 사람이 넘쳐나고 돈도 돌던 곳, 그러나 동시에 예수살렘 정통 유대인들의 눈에는 문화적으로나 유대 전통으로나 순수성을 잃은 일종의 ‘이민족’들의 지역으로 취급되던 곳이었습니다. 예수 시대에는 로마로 가는 지중해에 면한 탓에 유다총독과 로마군대의 주둔지가 있던 곳으로 정치적으로도 억압된 곳이었습니다. 혼란과 무질서, 방종과 착취, 인간사의 복잡다단, 사연 많은 애환이 그 어느 곳보다 극적으로 꿈틀대던 곳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다녀온 이스라엘 순례는 이러한 지역적 정황들을 더 분명하게 확인하는 계기였습니다. 여기에 새롭게 깨닫게 된 사실하나가 있습니다. 이곳의 환경은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것처럼 마르고 척박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래아와 가까운 사마리아 땅, 엘리야 예언자가 70명의 바알 제사장을 혼자 대적했다는 기손 골짜기에 면한 갈멜산에서 내려다본 평야는 정말로 비옥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 인근의 크고 작은 도시 역시 매우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이런 비옥함 덕분에 이 지역은 항상 이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장이었습니다. 이곳의 소외는 예루살렘 사람들로부터 민족적 순수성이나 종교적 전통으로 천대받던 것 외에도, 이 비옥함 덕분에 돈과 사람이 넘쳐났지만 그만큼 권력자들의 탐욕과 착취에 취약했던 곳이란 사실에서도 기인합니다. 대개 땅을 빌어먹는 소작농들이 모여 살았고 그들을 고용한 사람들을 정작 예루살렘이나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었답니다. 땅은 비옥하지만 굶주려야했던 곳, 돈이 들고나지만 제대로 된 거처하나 마련하기 어렵던 곳, 폭력과 무질서, 탐욕과 착취가 늘 들끓던 곳이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 시대 사람들과 오늘의 도시민들의 애환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이 한가운데서 우리 스승이 일생을 살았단 사실을 새삼 주목하게 됩니다.

 

축제 같은 성탄이 끝나고 다시 일상을 상징하는 연중이 시작된 이때, 복음이 다시 우리들의 시선을 공생활의 주요 무대인 갈릴래아로 인도하는 것에는 깊은 까닭이 있어 보입니다. 예수의 생을 한눈에 펼쳐놓고 보면 가장 극적인 마지막 일주일은 이 갈릴래아에서의 시간을 통해서만 해독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래아란 사실은 그분이 유대교의 쇄신이나 종교인들의 회개가 아니라 실로 '인간'을 구원하기위해 '인간을 향해' 오셨음을, 그것도 영적이고 정신적인 구원 따위가 아닌 몸과 마음, 온 존재, 전인적, 총체적 구원을 위해 지상에 오셨음을 깨닫게 합니다. (후일 "교회는 여전히 스스로에 대해서만 너무 많은 하고있습니다"라고 지적한 요한 23세의 통찰 역시 같은 맥락의 것이겠습니다) 그렇다고 갈릴래아만 떼어놓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곳에서 펼쳐 보인 기적(오천명을 먹이심, 물위를 걸으심)과 치유, 위로와 초대(사마리아 여인의 우물), 해방의 선포(행복선언, 진복팔단)는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을 통해 비로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방식도 아닌, 무상으로, 비폭력으로,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으로, 사랑으로 이 모든 것이 가능했음을 우리는 오직 저 마지막 일주일을 통해서만이 온전히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종교나 조직 따위가 아니라 정말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갈릴래아를 묵상하는 오늘, 오늘의 교회가 새롭게 서야할 자리가 어디인지 다시 물어야겠습니다. 예수는 부활한 후에도 자신을 만나려거든 갈릴래아로 오라고 이르실 정도였습니다. 거기, 그분이 서려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비로소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곳은 또한 우리가 쉼 없이 건설해야할 교회의 자리이기도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또 하나의 아름다운 광경, 곧 제자를 부르시는 자리역시 이른 새벽 노동하던 땀과 수고의 호숫가였습니다. 선택된 사람들이 모여 살던 예루살렘이 아닌, 거룩한 장막이 드리워진 지성소의 성전도 아닌, 매일의 고단함, 애환과 욕망, 갈등과 투쟁의 일상, 복잡한 장터, 바로 여기서 제자들을 부르셨음을, 특별한 선별조건도 없이 “지나가고, 보시고, 부르다”라는 단 세 마디의 간결함으로 부르셨음을 말입니다. 내 모든 애환을 끌어안고 그곳을 성전으로 삼으시는 주님, 보잘 것 없는 이들을 가장 먼저 눈여겨 제자로 부르는 주님, 예루살렘이 아닌 사람들이 오글대는 갈릴래아로 향하자고 길을 재촉하던 주님, 초막을 거두고 다시 저 아래 빼앗기고 쫓겨나고 매 맞는 사람들을 향해 가야한다고 성큼성큼 산길을 걸어 내려오시던 주님. 이 모든 ‘뒷모습’을 사랑하고, 쫓고, 닮아가고, 일치하는 우리가, 교회가 되길 기도해야겠습니다. 여전히 많은 것에 집착하고 절름거리는 교회를 다시 한번 ‘지나가고, 보시고, 부르시기'를! 그리고  “곧바로” 따라나서는 교회이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