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몸(2019년 12월 25일 성탄 대축일 낮미사)
2019년 12월 25일 성탄 대축일 낮미사
요한 1, 1-18
12월 23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청 종사자들에게 성탄 강론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 문명 안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더 이상 문화를 일구는 유일한 주체도, 우선적으로 또는 다수가 경청하는 종교도 아닙니다. 사목적 관점을 바꿔야만 할 때입니다. 그렇다고 어떤 상대주의적 사목으로 전환해야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의 그리스도 문명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과거처럼 평범한 삶의 분명한 전제로 받아들여지지도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거나, 심지어 부정되고, 놀림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교황의 발언은 언뜻 듣기엔 과거 교회가 누리던 황금기에 대한 향수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문화로 통합된 19세기 이전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또는 단순히 대다수의 나라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지 않는 최근의 경향을 개탄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가르침이나 말씀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 탄생 이후 19세기 본격적인 기계문명의 출현 이전까지는 삶의 양식이 예수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연의 순리에 기대 살아야하는 농경문화의 연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성서가 가르치는 세계관이나 실제로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살아가던 옛 사람들의 세계관이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현대 조류에 맞추어 살아야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조류에 따라 흐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어디서든 선포되어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더 이상 교회가 오늘에 영향력을 갖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동시대성’이 결여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성탄이면 구유를 꾸밉니다. 구유의 외형만 따지자면 과거와 비교해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메시지를 여전히 잘 표현하고 있다고는 볼 수는 없습니다. 구유도, 이미 성탄이 종교와 무관한 하나의 전통, 연을 마감하는 연례행사처럼 되어버린 것처럼 선물꾸러미와 화려한 트리처럼 시장의 상품으로 전락한지 오래이기 때문입니다. 구유의 목가적인 풍경은 물론 과거의 모습 그대로입니다만 그것은 그저 이즈음에 마주하게 되는 하나의 ‘이미지’일 뿐, 더 이상 사람의 심금을 울리지 못합니다. 가난한 목자들에게 고용된 더 가난한 목동도 없고, 들판도 마구간도 없습니다. 환경의 변화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큰 이유는 오늘의 구유가 구유로서 전해야할 메시지를 제대로 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징’은 어떤 특정한 체험이나 기억을 전제합니다. 체험이 깊을수록 상징의 영향력은 커집니다. 같은 ‘말’이라도 누군가에겐 가슴을 흔드는 말이기도 합니다.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고통을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시작입니다. 한 처음 ‘말씀’이 계셨는데 세상은 이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사람이 되신 후에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체험’한 사람들, 같은 시간을 공유했고 사건을 견뎌낸 사람들에겐 ‘예수’라는 ‘말’은 이제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말(예수)이 살아있는 몸(역사, 공동의 기억, 체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구유도 일종의 상징입니다. 오늘의 구유가 상품이상 일 수 없는 이유는 ‘몸’, 곧 오늘을 사는 사람들과 함께 나눌 체험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상징이 상징으로서의 상징성(메시지)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체나 소프라(Cenasopra), 체나 바쏘(Cenabasso). 유학시절 여름 방학에 머물던 이탈리아 북부 산간 마을의 이름입니다. 말의 뜻을 알고 나면 우선은 웃게 됩니다. 마을 이름이 위에서(sopra) 저녁식사(cena), 아래서(basso) 저녁식사라니! 끼니를 걱정해야만 하던 시절, 길 하나 사이를 두고 마주보고 있는 마을 사람들 사이 인사는 의례 “밥은 먹었니”였다고 합니다. 서로 걱정해주는 인사말이지만 꼬마들에겐 이웃동네보다 잘나 보이고 싶은 허세의 말로 사용되었답니다. 윗동네 아이들이 “우린 오늘 저녁에 닭고기 먹었다”라고 자랑하면 “우린 소한마리 통째로 잡았다” 식으로 허세를 부렸던 것입니다. 이름의 유래를 알고 나면 마냥 웃을 수만은 없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가난이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을 견뎠던 그곳의 사람들에겐 남다른 말인 것입니다. 이탈리아 마을에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탄이면 ‘살아있는 구유’를 볼 수 있었습니다. 고만고만한 마을사람들 사이, 어떤 인사인지 뻔히 알던 처지에서 ‘마리아’와 ‘요셉’으로 분한 이웃이 어떻게 보였을까 생각하면 재미있습니다. 아기 예수였던 아이, 그 이후의 삶이 어떠했을지도 궁금합니다. 분명 그들에겐 성인이, 성가정이, 예수가, 성서나 명화 속에서나 보던 추상적인 그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구유와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이례적으로, 상품처럼 꾸며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한 장면에 성가정을 소박하게 모시는 ‘생생한’ 그림이었을 것입니다.
이 간극이 어디 구유만이겠습니까. 현실의 삶과 신자로서의 주말의 시간, 저 두 구유 사이에 깊이 팬 골이 이제 더는 메울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두렵습니다. 선물 박스 사이에 끼어있는 상품화된 구유는 사실 없어도 그만이겠습니다. 우리가 마련할 구유는 마음 안에만 지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생생히 살아있는 하느님, 일상과 굳건히 연결된 마구간, 이웃의 얼굴을 한 거룩한 밤의 목동, 의롭게 살려는 모든 가장으로서의 요셉, 삶에 간섭하고 말을 거는 예수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의 교회가 할 일은 명백합니다. 예수라는 말을 ‘체험’하게 하는 존재. 그를 ‘이미지’에서 끄집어내 우리와 ‘동시대’를 살도록, 우리 안에 있고,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살아있는 말로 체험케 하는 것.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고 벗하고 함께 길을 걸었던 그분을 생생히, 살아있는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 교회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를 실감하게 하는 살아있는 구유, 살아있는 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