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9, 1 (2019년 10월 13일 연중 제28 주일)
2019년 10월 13일 연중 제28 주일
루카 17, 11-19
무역전쟁을 불러온 일본 측의 명분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공에 대한 대법원 판결입니다. 박정희 정부와의 한일협정, 지난 정부와 맺은 ‘불가역적’ 합의로 모두 해결되었다고 믿는 것이 일본의 입장입니다. ‘종군위안부’로 불리던 전쟁 성노예들에 대해서도 세상은 무지했습니다. 그 존재가 알려진 것도 이십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강제징용공의 존재에 대해선 더 깜깜했습니다. 얼마 전 기사를 통해 강제징용공 승소 판결에 일본인들의 조력이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재판을 위한 역사적 증거를 마련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합니다. 역설적인 것은 그들이 동포들로부터 눈총을 받으면서까지 이 사실들을 알려나갈 초기 정작 당사자인 징용공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족도 모를 만큼 철저히 과거를 감춰왔던 것입니다. 이 소수 일본의 양심적 목소리에 징용공 출신 할아버지 하나가 처음 연락해왔습니다. “도대체 당신들은 일본인이면서 왜 이런 일을 도모하는가. 그 저의가 무엇인가.” 답은 이랬습니다. “인간의 도리이고 나아가 인류에게 이런 범죄를 저지른 나라의 후손이란 사실이 참을 수 없어서다.” 그날로 할아버지는 그들과 뜻을 같이했고 그렇게 서로의 존재를 애써 모른척하던 다른 할아버지들도 아름아름 합류하게 되었답니다. 할아버지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일이 보상금 때문이 아니라 이런 죄악이 다시는 역사 안에 반복되어선 안 되겠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가해자 나라 출신임에도 피해자들을 위해 애쓴 일본인. 이들을 생각하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문명, 지식, 그럴듯한 삶의 조건이 아니라 ‘상상력’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 인간만이 갖는 능력입니다. 곧 끝장날 것 같은 인류가 지금까지 버티어 온 것도 분명 이 능력 때문일 겁니다. 연민, 측은지심, 인류애, 모두 상상하는 능력에서 비롯된 인간만이 갖는 능력입니다.
제가 주목한 것은 그러나 이 대견한 일본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할아버지들입니다. 자신의 부인조차 모르게 꼭꼭 감추었던 과거. 그들은 그 시간들을 없었던 것으로 스스로를 속이면서까지 정상의 인간, 평범한 삶처럼 살려고 애썼을 겁니다. 나서지 못한 것은 어두운 과거를 드러내는 것이 어쩌면 사회적 낙인의 반복일 수 있고 그것으로 평범한 삶을 다시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런 그들이 다시 목소리를 내고, 그 목소리가 비단 억울한 과거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이러한 비참한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지금도 다른 형태로 벌어지고 있는 온갖 폭력과 구속들을 고발하기 위함이란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고통을 입어본 사람만이 진정한 공감자, 치유자일 수 있나 봅니다. 그들은 정상의 삶에서 밀려나 소외와 억압의 시간을 견디어냈지만 정상인의 무리로 단지 복귀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삶 속으로 다시 자신을 감춘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로 벌어지는 타인의 고통을 알아보고 그들을 돕는 전혀 다른 생을 얻은 것입니다. 그들에게 고통은 그러니까 단순한 걸림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눈뜨게 한 창문이었던 셈입니다.
복음의 예수는 10명의 나환자를 치유합니다. 한명만이 감사를 드리러 예수를 다시 찾아옵니다. 아홉은 어디로 갔을까. 질병을 죄에 대한 징벌로 여기던 당시 유대 사회에서 그들이 받는 고통은 비단 육체의 뭉그러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회로부터의 격리, 추방, 철저한 소외가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아마도 성한 몸이 된 그들은 평범한, 정상의 무리들 사이에 끼어 누려보지 못한 일상을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과거를 지운 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들 중 하나로 몸을 숨기고자 했을 겁니다. 감사 인사를 하러온 단 한명, 그 역시 비슷한 것을 꿈꾸었겠지만, 나병 외에도 그는 벗어날 수 없는 또 다른 낙인이 있었던 존재입니다. 사마리아 출신. 정통 유대인도 아니요 심지어 외국인으로 취급받던 혈통. 태생적으로 소외된 삶이었는데 거기에 얹어 나병까지 앓았던 이중의 소외를 견뎠던 사람. 소외 중의 소외, 변두리 중의 변두리, 삶의 끝단까지 내몰린 사람. 치유해준 예수에게 다른 아홉도 분명 감사했을 겁니다. 하지만 인사를 올리러 오는 걸음은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주저했겠지요. 차라리 외면하길 택합니다. 그러나 사라마리아 사람만은 이 고통의 끝자리에서 아마도 다른 빛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과거를 지우고 평범한 무리 사이, 자신을 밀어내고 낙인찍고 쫓아낸 이들 사이로 돌아기길 택하기 보다는, 자신처럼 변두리로 내몰리고 손가락질 받는 이들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을 것입니다. ‘복귀’가 아니라 진정으로 ‘다른 삶’을 꿈꾸었을 것입니다.
고통은 어떤 미사여구로도 꾸며질 수 없습니다. 교훈, 의미 따위는 없습니다. 억울함이고 아픔일 뿐입니다. 다만 고통을 대면하는 법은 다를 수 있습니다. 어서 내 앞에서 치워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삶, 진짜 성한 삶으로 나가는 빛일 수 있는 것입니다. 좁고 폐쇄적인 집단 속으로 다시 몸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롭고 자유롭고 넓은 세상을 만나는 길목일 수 있습니다. 고통 받는 이웃을 알아보고 삶의 깊이를 이해하며 다른 세상을 살게 하는 초대일 수 있습니다. ‘특이한’ 일본인들이 징용공 할아버지들에겐 저 멀리서 다가오던 예수 같은 사람이었겠습니다. 저 사람의 말은 진심일까. 저 사람의 연민은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질문했을 겁니다. 과거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만방에 알리길 택한 할아버지들의 용기는 성한 몸이 되었지만 자신을 쫓아내고 몰아낸, 편협한 ‘평범한 삶’이라는 무리 안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예수에게 인사하러 오길 결심한 사마리아인의 결심이겠습니다.
우리의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여야 하겠습니까. 정상인의 무리, 평범한 사람들만의 친교라면 얼마나 이율배반적입니까. 다시 하느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려 돌아오는 저 한 사람의 공동체가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배고픈 이들의 밥, 통곡하는 이들의 손수건, 아픈 이들의 약, 깜깜한 어둠의 빛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번듯한 아홉입니까 아니면 거룩한 하나입니까. 빼앗기지 않을 아홉입니까 아니면 내어놓는 하나입니까. 거룩한 하나같은 공동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프고 병들고 고달픈 인생들이 말을 걸 용기를 낼만한 스승의 얼굴을 닮은 공동체면 좋겠습니다. 좁고 어두운 안온함이 아니라 폭풍우와 더위, 갈증과 추위, 배고픔의 세상이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오고 안으로 들어오고 손을 내미는 광장 같은 곳이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