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다 (강론)

검은 개가 검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2019년 10월 6일 연중 제27주일)

바깥 주인장 2019. 10. 6. 00:23

2019년 10월 6일 연중 제27주일

루카 17, 5-10

 

믿음을 더해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강함과 약함, 높고 낮음, 많고 적음이라고, 흔히 물량적으로 믿음의 정도를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승은 동문서답 같은 두 개의 비유로 답할 뿐입니다. 겨자씨 같은 믿음만 있어도 돌무화과나무를 바다로 옮길 힘이 있다는 대목까지는 그만큼 믿음이 대단하고 놀라운 능력을 발휘할 것이란 걸로 어렵지 않게 해석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어지는 종에 대한 비유입니다. 더더욱 그 결말은 앞선 비유와 맥락상 연결되지 않습니다. 성실한 종에게 돌아오는 것도 칭찬이나 보상이 아닙니다. “쓸모없는 종”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이쯤 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믿음이라는 첫 번째 비유에 대한 해석은 상당히 의문스러워집니다. 혹 스승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1독서 하바쿡 예언서가 저의 이러한 질문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새로운 강대국 바빌론에 함락될 때의 예언서입니다. 예언자는 불의한 현실 앞에 하느님께 언제까지 이런 상황을 참고 견뎌야하는지 항변합니다. 그때 예언자에게 신탁이 내립니다. 예언자는 환시를 봅니다. 이 환시는 정해진 때에 기어코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줍니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오고야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환시를 본 자의 태도는 이제 하나밖에 없습니다. 기다리는 것입니다(너는 기다려라, 하바쿡 2, 3) 2독서, 바오로가 공동체의 지도자인 디모테오에게 이르는 말 역시 같은 맥락의 이야기입니다. “다시 불태우라”, “부끄러워하지 말라”, “고난에 동참하라”, “훌륭한 것을 지켜라”. 모두 ‘견디고’ ‘지키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견디고 지킬 수 있는 것은 앞날에 대한 확신 때문일 것입니다. 환시를 통해 앞으로 닥칠 일을 이미 목격한 예언자, 온갖 불의한 현실 앞에서도 용감히 예언할 수 있고, 직분에 성실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이 확신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믿음은 막연한 앞날에 대한 가늠이나 기대, 대비와는 다른, 앞으로 이루어질 일에 대한 확신, 기다림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제자들의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청은 그 자체로 모순인 것입니다. 믿음은 더 기대하거나 덜 기대하는 양적인 것이 아니라, 결심이나 마음가짐의 차원이 아니라, 마치 앞일을 이미 목격한 자의 인식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설명해보겠습니다. 빛이 한 뼘도 들지 않는 완벽한 어둠의 방이 있습니다. 빛이 없으니 무엇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방에 검은 개가 들어갑니다. 여전히 어두워 아무것도 확일 할 수 없는 상태지만 분명 방안에 개가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방안에 개가 들어가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에게 방 안에 개가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없는 부동의 사실입니다. 믿음은 어쩌면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는 막막한 내일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기어코 이루어질 일을 미리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확신에 가까운 것이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언자의 환시는 초현실적 몽상이 아니라 실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앞당겨 확인한 자의 ‘증언’인 것입니다. 이 환시를 본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의 가장 큰 특징은 ‘성실’입니다.(하바쿡 2, 3 참조) 기어코 오고야마는 일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던 일을 지속하는 것, 견디고 지켜내는 것, 고난에 무너지지 않는 것,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2독서 전체 참조) 믿음 fides과 충실 fidelitas이 동일한 어근 fide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 역시 이를 뒷받침 합니다.

 

아무리 작은 씨앗이라도 그것이 기어코 자라 아름드리나무가 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고야마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이 오면 언제든지 시중을 들 수 있도록 대기하는 것이 ‘종’의 일입니다. (오늘의 비유는 하느님이 무자비하고 가혹한 주인이란 이야기도, 마냥 겸손하란 이야기도 아닙니다) 종이 자신의 일을 지속할 때 종으로 여전히 불리 울 수 있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깜깜한 방이라도, 불의가 승승장구하는 현실이라도, 아무것도 희망할 수 없는 감옥의 밤이라도, 저 방안에 개가 있고, 불의가 패주할 것이고, 마침내 동이 틀 것임을 미리 알고 견디는 사람이 신앙인이겠습니다. 여기서의 ‘견딤’은 그러나 버티고 서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일을 쉬지 않고 해나가는 것입니다. 현실에 영합하지도, 적당히 물러서지도, 무너졌다고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길을 여전히 걷고자함입니다. 그는 이미 알고, 보았고, 확신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며칠 전 신임 주교들에게 이렇게 훈시했습니다. “당신들이 말해야 할 것은 ‘적합하거나’ ‘적합하지 않거나’에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당신들의 말은 ‘참’에 관련된 것이어야 합니다. 증언이고 선포이어야 합니다.” 주교가 행정가가 아니라 사목자임을, 신앙인임을 기억하라는 대목에서 나온 이 말은 비단 교회 지도자들에게만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증언은 본 것을 진술하는 것이고, 선포는 말해야할 것을 외치는 것입니다. 어둠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안에 있는 개를 부정할 순 없는 것입니다. 있다고 말해야합니다. 올지 말지 알 수 없는 미래 앞에 적절히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람들이 반응할지 따지고 적절한 말을 찾아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증언하고, 오고야말 것을 선포하고, 그것을  먼저 살아내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깜깜한 현실에 넘겨줄 수 없는 마지막 말은 이것이겠습니다.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