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질러 떠나다(2019년 2월 3일 연중 제4주일)
2019년 2월 3일 연중 제4주일
루카 4, 21-30
남이 걷지 않는 길을 걷는 것은 어렵습니다. 당사자에겐 미지의 길이라 두려운 것이겠지만 지켜보는 이들에겐 어리석은 짓으로 비쳐지기 때문입니다. 꽤 오래전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국의 광산 마을에서 대를 이어 광부를 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주인공 빌리는 춤을 좋아합니다. 그것도 계집아이들이나 하는 것으로 여긴 발레를 하길 원합니다. 대대로 광부만 하던 집이니 얼마나 고루하고 완고했을까. 당치도 않은 꿈입니다. 영화는 60년대, 광부와 같이 임금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지는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가차 없이 저임금과 빈곤, 대량해고로 내몰리는 대처리즘이 휘몰아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파업으로 도무지 축제분위기가 나지 않는 성탄에 벽난로에 둘러앉아 의례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어김없이 우스꽝스런 모자들을 쓰고 뜻 없는 성탄인사를 나누는 가족의 모습은 꽉 막힌 현실 앞에서도 인간을 그저 주저앉게 만드는 ‘익숙함’에 대하여 생각하게 합니다. 광부라는 타고난 숙명, 완고한 현실을 뚫고 우여곡절 끝에 빌리는 발레리노가 됩니다. 아들을 왕립 발레학교에 보내놓고 다시 광산 밑바닥으로 내려가려 승강기 철문에 스스로 갇히는 아버지의 모습은 먹먹합니다. 하지만 편견과 익숙함이란 완고함을 뚫고 비상하는 것은 빌리만이 아니라 다시 땅속으로 내려가야만 하는 아버지이기도 한 것입니다. 비록 땅속에 다시 들어가야 하는 그이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아들을 겪은 그는 더 이상 이전의 그가 아닌 것입니다. 아직 제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전의 그들이 아니라, 전혀 다른 길도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새로 난 이들인 것입니다. 이미 도약했지만 완전히 높아지지 않았을 뿐,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지난주, 가난한 이, 눈먼 이, 갇힌 이, 억압 받는 이에게 해방과 자유, 광명을 주러왔다는 예수의 사명이 선포되던 회당의 뒷이야기입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익숙한 일상 공간입니다. 또 그곳은 예수의 주 활동무대였던 가파르나움을 비롯한 갈릴래아 일대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고향입니다. 복음은 회당이라는 익숙한 공간에, 고향이라는 더 익숙한 환경 안의 사람들에게 예수가 배척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한 그들에게 예언서를 읽고 해석하는 예수는 돌연 낯선 존재였던 것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의 심리는 똑같은 것인가 봅니다. 예수는 그들을 자극합니다. 예언자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았고’,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다수가 있는 익숙한 공간 안에, ‘안전’하고 ‘옳은’ 곳에 있다고 믿던 그들에겐 충격, 아니 도발인 것입니다.
지난주 이야기가 예수의 사명, 곧 파견된 이에 대한 이야기라면 오늘은 파견된 자를 받아들이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곧 말씀의 선포가 있다면 말씀을 듣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편견과 아집, 욕망으로 뭉친 완고한 이들 앞에서 선포해야하는 예언자는 그들과 맞설 수밖에 없는 위험한 숙명을 짊어진 사람이지만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이 익숙한 것들과 맞서야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위험한 일입니다. 1독서 예레미아에게 하느님은 ‘임금’과 ‘대신들’, ‘사제들과 백성’을 맞설 수 있도록 ‘요새의 성읍’, ‘쇠기둥과 청동 벽’처럼 만들어주겠다 약속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역으로 임금과 대신들, 사제와 백성은 좀처럼 흔들리지도 뚫리지도 넘어가지도 않는 요새로 이루어진 성읍, 쇠와 청동으로 이루어진 기둥과 벽처럼 완고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임금은 세상 권력의 정점이요, 대신과 사제, 백성은 그런 대세에 부흥하는 시류입니다. 세상의 시류를 거슬러 고발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화가 난 이들이 고을 밖으로 끌고나가 벼랑에서 떨어트릴 만큼 위험한 일입니다. 단순히 고발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이 시류를 벗어나 새 길에 접어드는 행동 역시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일입니다. 새길을 걷기 위해 감당해야하는 것을 세상은 ‘어리석음’이라 할 테지만 우리는 ‘십자가’라 부릅니다. 시류를 거스른다는 것은 ‘마을 밖’으로 내쳐지고 벼랑으로 내몰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안전하고 옳다고 여기던 고향을 버려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길을 걷는 이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야 땅 깊숙한 곳으로 아들과 함께 걸어야했고, 모세는 따듯하고 배부른 고향 이집트를 버려야했습니다. 예언자들도 모두 길 위의 사람들이었고 예수 역시 고향을 떠나고서야 ‘요새의 성읍’, 임금의 도시, 예루살렘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1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는 “더 큰 은사”, “더 뛰어난 길”은 옳고 안전하다고 여기는 고향을 떠나야 얻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이 길은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스승처럼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는 것”입니다.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 저임금과 실직이라는, 앞으로도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삶이지만 다른 삶이 가능할거라고도 이미 믿지 않는 그는 스스로 제 삶의 굴레에 갇힌 사람입니다. 안전하고 옳다고 여긴 그곳은 하나도 안전하지도 옳지도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안전하다고 옳다고 믿는, 아니 그렇게 배웠고 익숙해져버린 세상 역시도 사실 안전하지도 옳지도 않은 것입니다. 진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편견과 아집, 욕망으로 만든 우상을 버리고, 익숙해져 안전하다고 믿는 거처마저 떠나야하는 것입니다. 그것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야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