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그리고 3년 (2018년 12월 30일 성가정축일)
2018년 12월 30일 성가정축일
루카 2, 41-52
\혼밥, 종일반, 고시텔, 요양원, 장례식장, 납골당. 20년 전만해도 없었던 말들입니다. 산업화 이후 삶의 형태는 쉼 없이 변해왔습니다. 근대사회의 특징인 분업화와 전문화로부터 가정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가족이 누리던 공동시간 역시 세대와 목적에 따라 분철 되었습니다. 생로병사, 생의 주요한 매듭 역시도 전문화된 공간에서 치러집니다. 동, 호수로 나뉜 거주형태는 죽어서도 이어집니다. 이전에 가족이나 이웃사촌, 마을공동체가 감당하던 것들이 모두 돈으로 해결 가능한 소비의 형태로 전락했습니다. 가정역시 철저하게 자본에 잠식된 것입니다.
혹자는 배우자를 고르는 가장 효과적인 기준은 직업이나 학벌, 경제능력이 아니라 ‘어머니의 혀’라고 말합니다. 언어란 무릇 사람됨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대개 인간의 제 1학교라고 부르는 가정에서 습득됩니다. 아이는 부모의 언어를 물려받습니다. 말솜씨는 소통의 기술 이전에 인격의 무게이자 문화적 뿌리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근래 회자되는 공교육의 붕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젠 그 누구도 뛰어난 기획자가 등장해 어떤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통해 이 하염없는 붕괴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세상으로 난 첫 창이라고 할 수 있는 부모와 가정은 이런 의미에서 현 교육의 피해자인 동시에 책임자인 것입니다.
3년 동안 불꽃같이 살다간 예수입니다. 이 뜨거운 생을 생각하면 우리가 알길 없는 가려진 30년이 궁금해집니다. 그나마 루카만이 유년기를 오늘 복음처럼 언급할 뿐입니다. ‘공적’생활이전의 ‘사적’생활은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지낸 나자렛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 가려진 시간은 생각보다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가 3년간 분출한 것들은 이 가려진 시간 동안 숙성된 열매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생활의 시작, 카나의 혼인잔치 역시 옆집 잔치에 일손을 보태던 어머니의 청으로 이루어진 것을 기억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웃집 사정을 제 사정처럼 여긴 어머니의 마음이 없었다면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고, 저주받은 이들과 어울리고, 가난한 이를 벗하던 예수는 당대 기준으론 실로 파격적인 인간이었습니다.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라 애초에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확신에 기초한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사실 그것은 계율과 의무, 계명과 율법의 성실한 준수가 구원에 이르는 길이란 착시 현상을 일으키던, 유대사회의 지배 가치에 정면으로 맞서는 내용이었습니다. 나자렛 가정은, 몰락한 왕족인 요셉과 배운 것 없는 마리아가 꾸린 이 가난한 가정은 하느님의 진짜 얼굴, 심판이 아닌 자비의 하느님을 알아본 혜안, 보화 같은 통찰력을 품은 가정이었던 것입니다.
1920년 성가정축일이 제정됩니다. 급속한 산업화와 세계대전이라는 격변기, 땅에 기대어 살던 삶의 형태가 빠르게 해체되며 전통적 가족형태도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이 축일 기념하는 이유가 전통사회로의 복귀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잠자는 곳’으로 전락한 오늘의 가정을 지배하는 가치는 아쉽게도 ‘생존’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전의 가정들은 세상의 모든 부모와 자녀가 그러한 것처럼 무상의 사랑을 배우고, 고통을 나누고, 함께 견디며, ‘미우나 고우나’ 감당하던 ‘관계의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네 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찾은 줄 아느냐”라는 어머니의 말에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하는 줄 모르셨냐”란 대화에는 4계명과 1계명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비단 가정의 어버이만이 아니라, 그 어버이와의 관계를 통해 더 큰 아버지, 더 큰 가정, 곧 이웃을 배웠던 것입니다. 사랑이 비단 가족 성원끼리의 사랑이 아니라 이웃을 가족처럼 환대할 수 있는 넓은 사랑을 배웠던 것입니다.
복음은 부모가 이 당돌하게 맞받아친 예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장하고 변화하는 자녀를 신뢰했고 자라는 아들과 함께 부모도 성장했음을 의미합니다. 딱히 자랑할 것 없는 부모였지만, 저 역시 새벽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귀가하는 길에 걸인을 모셔와 안방에 밥상을 차려 환대하던 부모의 행동이 이해할 순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어떤 인문교양서보다 강렬하고 구체적인 인간됨의 교육이었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화였음을 깨닫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님은 천둥벌거숭이 같은 자식의 선택을 항상 신뢰하고 언제든 기다려주셨다는 것을 느낍니다. 3년의 예수란 만개한 꽃에 30년이란 뿌리가 있었습니다. 가정이란 일상의 밭에 묻힌 보화를 우리도 꼭 지켜야겠습니다. 귀한 3년을 품은 30년 어머니 땅을 빼앗기지 말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