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질문(2018년 12월 24일 성탄대축일 밤미사)
2018년 12월 24일 성탄대축일 밤미사
루카 2, 1-14
토스트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중 그 유명한 ‘대심문관’ 부분에 영감을 얻어 글라주노프라는 이가 1985년 그린 작품입니다. 예수와 늙은 대심문관 뒤 창문으로는 큰 탑과 화형장면이 보입니다. 큰 탑은 16세기 벨기에 화가 브뤼헐이 그린 인간 교만의 상징 바벨탑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의 순수성 보호란 이름으로 중세 때 유행하던 이단자들의 화형장면입니다. 작품이 너무 두꺼워 시작은 했어도 끝마친 사람은 별로 없지만 적어도 한번쯤은 들었을 만큼 대심문관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예수가 다시 지상에 옵니다.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열광하고 회개의 눈물을 쏟아냅니다.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대심문관으로 대표되는 교회입니다. 그는 예수를 끌고 와 심문하며 조용히 돌아갈 것을 요청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자신들의 계획을 망치고 혼란만을 부추길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언뜻 듣기엔 복음의 순수성을 잃은 교회에 대한 비판 같지만 실상 작가는 인간의 자유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습니다. 대심문관은 단순히 부패한 교회를 상징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식과 고행을 누구보다 열심히 실천했고 청빈하고 근면한 사람입니다. 오히려 인간과 복음에 대하여 깊고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입니다. 그의 주장은 인간은 나약하고 본성상 죄로 기우는 경향을 가졌기 때문에 완전한 자유로는 구원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계명과 법, 종교적 의무와 규범 등으로 적절히 자유를 제한받을 때 오히려 인간은 평안과 안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자유로 하늘에 닿을 수 없다면 적어도 지상 삶에서라도 그런 계명과 의무를 다하며 평안을 얻게 하는 것이 이 가련한 인간들을 사랑하는 길이라 주장합니다. 둘의 뒤로 비치는 바벨탑과 화형장면은 그러니까 인간 자유의 결과와 이를 제한하는 종교라는 제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떠납니다. 이 이야기는 작가의 복잡한 종교관과 인간관으로 빚어낸 순전한 창작이지만 구원과 인간의 자유에 대해 깊이 질문하게 합니다.
대심문관의 말대로 자유로운 인간은 구원에 닿을 수 없을까? 저는 심문관 앞에 아무 말 없던 예수의 침묵을 생각해봤습니다. 심문관의 주장에 대한 동의일까. 아닐 겁니다. 이 말하지 않은 부분은 어쩌면 인간에 대한 예수의 깊은 신뢰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러시아 대문호는 인간의 구원을 ‘죄’와 연결 짓고 있습니다. 하지만 맨 마지막 날에 우리가 답할 하느님의 마지막 질문이 과연 죄의 여부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렇진 않을 겁니다.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고 때론 잔인하고 참혹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희생적이고 아름다운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조건 없는 어머니의 사랑,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무상의 헌신, 사랑하는 이를 위한 무아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이 가장 인간다운 사랑은 인간답기에 또한 거룩하고 신적인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은 이 나약하고 참혹한 인간으로 지상에 오십니다. 이 하느님은 동시에 희생하고 조건 없이 자기를 내어주는 아름다운 인간으로도 지상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고, 가난한 목자에게 고용된 더 가난한 목동들의 첫 인사를 받았고, 요람이 아닌 가축의 먹이통 위에 몸을 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주듯 인간의 가장 밑바닥으로 오십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나약해도, 죄로 얼룩져도, 탐욕스러워도, 불안해 상대를 밟고 올라서도, 비굴해 강자에게 머리를 조아려도 이 남루한 인간으로 오시는 하느님은 이 인간이란 죄 안에서 사랑의 능력을 보십니다.
맨 마지막 순간에 우리에게 죄를, 무죄함을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물으실 거란 확신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 스스로 이 비참한 인간으로 오셔서 그분 스스로 가장 빛나는 희생적 사랑과 무한한 자비와, 한없는 인내의 생을 완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어둠이 짙습니다. 무관심이 내다버린 고통이 너무 많습니다. 24살 앳된 청년 노동자의 죽음, 결국 408일을 넘기고 성탄을 40미터 고공 위에서 보내야하는 해고자들, 고된 삶을 살다 황망히 떠난 천호동 골목의 슬픈 여인들, 자정 어스름이면 침낭을 이고 공원에 그림자처럼 스며드는 집 없는 이들. 염원도 많습니다. 한반도의 평화, 젊은이들이 자신의 삶을 설계할 정당한 기회, 육체적 고통에 함께 아픈 가족들의 쾌유. 기도할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 이 밤 다시 또 이 어둠과 혼돈, 염원 한 가운데로 ‘우리의 모습’으로 다시 오시며 여전히 인간에게 보내는 하느님의 무한한 신뢰를. 기억해야겠습니다. 죄가 아니라 사랑을 물을 마지막 순간을.